티스토리 뷰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또는 비무장지대로 향하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강행하지 못한다.” “비무장지대 내의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이거나 그가 들어가려고 요구하는 지역의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느 일방의 군사 통제하에 있는 지역에도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새로운 지리적 구역을 만듦으로써 중단되었다. 1953년 7월27일 체결된 휴전협정은 휴전선을 따라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폭 4㎞의 땅을 비무장지대(DMZ)로 정하고 어떤 사람이라도 접근을 엄격하게 제한한다고 명시하였다.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누구도 갈 수 없는 땅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휴전협정문의 “조건과 규정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군사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생태환경에 가져온 변화가 대표적이다. 휴전 이후 65년간 사람의 발길이 엄격히 제한된 비무장지대에는 여러 생물들이 터를 잡았다. 1974년부터 지금까지 수행된 생태조사 결과들을 취합하고 분석하여 2016년 환경부가 발간한 <DMZ 일원의 생물다양성 종합보고서>에 의하면, 91종의 멸종위기 야생생물을 비롯하여 4800종이 훌쩍 넘는 동식물이 이 좁고 긴 땅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 전체에 서식하는 생물종의 20%, 멸종위기종의 41%에 해당하는 숫자다. 반달가슴곰, 산양, 사향노루와 수달 같은 포유류와 겨울철새인 두루미와 재두루미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을 서식지로 삼는 대표적인 멸종위기종들이다.

누구도 갈 수 없도록 철책이 둘러진 땅은 그 어느 곳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생물이 사는 곳이 되었다.

전쟁과 환경 변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리사 브래디는 냉전의 마지막 남은 유물이라는 정치사적 의미에서 한발짝 벗어나 비무장지대가 갖는 환경사(環境史)적 의미에 주목한 바 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땅의 환경 변화는 그 남쪽과 북쪽에서 인간 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광범위한 환경 변화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비무장지대는 몇 십 년 동안 외교적 실패를 상징해 왔지만, 환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냉전이 가져온 최대의 성공”이기도 하다. 비무장지대의 생태가 잘 보존된 데에는 지속된 군사적 긴장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전쟁과 갈등의 결과로 만들어진 땅의 역설이다.

우리는 또 한번 정치문제와 환경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지점을 지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달 27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으로 ‘통일’이라는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함께 ‘번영’을 강조한 판문점선언문은 당장 남북 간 경제협력과 새로운 개발사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프라 건설이다.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를 잇는다는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이 남북 모두에 가져올 경제 효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크다. 분단으로 인해 섬나라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남한 사람들에게는 대륙으로 연결된 철도를 이용해 부산에서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감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구상은 ‘평화발전소’ 건설이다.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북한의 심각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한 중장기 협력방안으로 접경지역 또는 비무장지대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사업들은 평화에 대한 열망과 ‘번영’에 대한 기대를 철도와 발전소의 형태로 ‘물화’하는 역할을 한다(최형섭, ‘인프라와 한국의 미래’ 참고).

그러나 한층 고조된 남북 간 화해 분위기는 비무장지대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일 수만은 없다. 이미 오래전 과학자들은 비무장지대 안에서 사람들의 활동이 생태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도로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이 비무장지대를 서식지로, 번식지로, 그리고 월동지로 삼는 멸종위기종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군사적 긴장이 누그러지고, 좁고 긴 땅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늘어나고,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잦아질수록 비무장지대 생물들의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한반도에 어렵게 찾아온 협력의 기회를 비무장지대의 환경생태 보존을 위해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아주 어려운 이중의 과제에 직면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평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환경 보존을 모색해야 한다.

철도나 발전소를 짓듯이 평화에 대한 의지로 비무장지대 생태를 보존할 수는 없을까. 우리 정부는 이미 비무장지대를 생태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곳으로 특별히 지정하고 관리하고 있다. 자연환경분야 최상위 종합계획인 자연환경보전기본계획은 비무장지대를 백두대간, 도서연안, 5대강 수생태축과 더불어 ‘국가 핵심 생태축’으로 구분한다. 2016년에 수립된 제3차 자연환경보전기본계획은 2025년까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일대의 지역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등재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유네스코 등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개발계획이 빠르게 진행될 때 비무장지대의 생태 보존계획 또한 철저히 계획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끊어진 철도를 연결하거나 발전소를 짓는 일만큼 비무장지대 생태환경을 조사하고 보존하는 일은 꼼꼼하고 단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연둣빛 잎사귀가 막 돋아난 숲을 배경으로 도보다리 위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정상의 모습은 새 소리와 함께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박새나 직박구리 같은 텃새들뿐 아니라 되지빠귀 같은 여름철새까지 총 13종의 한반도 대표 여름새들이 내는 소리였다. 미래의 비무장지대에서도 여전히 이 새들을 만날 수 있을까.

<강연실 | 과학잡지‘에피’편집위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