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의도에서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한 정치인의 부고가 잔잔한 울림을 만들고 있다. 허대만 더불어민주당 전 경북도당 위원장의 얘기다. 어제(24일) 아침 포항종합운동장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향년 54세, 한창 일할 나이, 암 투병 끝에 부인과 3남 1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타계 소식이 애달팠던 것은 그러한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특별한 그의 정치 여정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1992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그는 지방자치가 부활하자 곧장 고향 포항으로 달려갔다. 풀뿌리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고 한다. 그 길로 1995년 제1대 포항시의원으로 당선, 26세 최연소 지방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인의 성공 여부가 배지를 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성공은 거기까지였다. 그 후 지금까지 허대만은 ‘보수의 심장’에서 도전했던 모든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걸 손꼽아보니 모두 7차례 도전, 7번 패배다.

‘바보’ 노무현도 민망해할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늘 웃었다. 힘들어도, 좋아도,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는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이름있는 정치인 이강철처럼 담대하지도 않았고 김부겸처럼 호방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이 여렸다. 늘 수줍은 소년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30년 세월을 도전하고 또 도전했던 불굴의 용기는 사실 ‘마음 여린 자의 용기’였지 싶다. 언젠가 고려대 이문영 교수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자신을 설명하면서 ‘겁 많은 자의 용기’라고 했던 것처럼 허대만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신에게 반항한 죄로, 산꼭대기까지 큰 바위를 밀어 올리는, 무한 반복의 천형을 받은 시지포스처럼 그 지긋지긋한, 패배가 예정된 선거를 허대만이 계속한 이유를 설명하는 말은 ‘마음 여린 자의 용기’이다. 대구, 경북에서 지역주의를 허물어버리고 정치적 다양성과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그 힘든 역사적 과제를 차마 외면하거나 뿌리치지 못했던 그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구, 경북에서 그렇게 평생을 견뎠다. 거기에서 민주당 정치인은 놀림감이었다. 어떤 당은 막대기를 꽂아도, 과메기를 공천해도 당선이 될 거라는 농담을 할 정도인데 민주당은 늘 조롱거리였다. 모멸과 좌절을 삼키는 것이 정치인의 덕목이라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것만큼 대구, 경북 민주당 정치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여의도 민주당의 전략 부재다.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을 외치면서 무슨 일을 벌일 듯하다가 흐지부지해 버리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지역주의란 그것을 없애자고 떠들면 떠들수록 더 커지는 괴물인데 여의도 민주당은 지역주의 타파하자고 북 치고 꽹과리만 칠 뿐 구체적으로 뭘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김대중이 ‘동진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이 ‘전국정당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취했던 전략 패키지 같은 것도 최근에 와서는 볼 수가 없다. 민주당에서 대구, 경북은 무엇일까? 바둑판에서 대마를 잡기 위해 전략적으로 버리는 돌이 있는데 대구, 경북은 그런 사석(捨石)인가? 그런 돌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지금 대구, 경북 민주당은 이도 저도 아니면서 의미 없이 버려지는 사석(死石)이 아닌가?

 

허대만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런 조롱과 모멸, 좌절들이 쌓여 그에게 암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의 죽음이 애달프고 억장이 무너져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얘기가 일리가 있든 없든 민주당은 이 시점에서 그가 어려움 속에서 이루고자 했으나 못다 한 꿈에 대해 응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대구, 경북에 정치적 다양성을 실현하고 전국적 수준에서 지역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마음 여린 자의 용기’로 그가 한평생 꾸었던 꿈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민주당은 자신들의 최전선 ‘보수의 심장’에서 평생을 바치며 싸우다 모든 것을 다 쏟아놓고 표표히 떠난 허대만에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노무현이 ‘권력의 절반을 내주고’라도 실현하자고 했던 선거제도 개혁이다. 허대만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꿈이라는 말을 남겼다. 궁극적 꿈이라는 얘기일 터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비례대표제이든 중대선거구제이든 가릴 것 없다.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면 된다. 그리고 그 개혁선거법을 ‘허대만 법’이라 불러주면 어떻겠나. 민주당의 동토(凍土)에서 좌절과 모멸을 삼키며 싸우다 세상을 떠난 ‘마음이 여린 자의 용기’를 기리고 애달픈 그의 정치 여정을 연민하며 민주당은 개혁선거법을 만들라.

 

김태일 장안대 총장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1,733건의 관련기사 연재기사 구독하기 도움말 연재를 구독하시면 새로운 기사 정보를 알려드립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 초기화

www.khan.co.kr

 

'정치 칼럼 > 정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대한 구상’의 뚜렷한 한계  (0) 2022.08.30
헛다리 짚기  (0) 2022.08.26
어떤 광복절  (0) 2022.08.19
연금개혁, 팩트 점검에서 시작하자  (0) 2022.08.18
생각하는 대통령이어야 산다  (0) 2022.08.17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