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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은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린다. 달러가 기축통화인 데다, 연준은 발권력까지 갖고 있으니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나온 말이다. 요즘 이 표현이 별로 과장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달 26일 세계 중앙은행 책임자들이 모이는 잭슨홀 미팅에서 강력한 긴축(기준금리 인상)을 천명한 뒤 1주일 동안 전 세계적으로 5조달러(약 7000조원) 규모의 주식 가치가 증발했다. 연준발 긴축은 한국에서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여기저기서 대출을 끌어모아 집을 산 청년층에 이자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사례일 뿐 언제 어떤 식으로 강달러가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경제를 뒤흔들 것인지 예측불허다.

연준이 성장을 희생하고라도 물가부터 잡으려는 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자금이 많이 풀린 데다, 글로벌 공급망 교란 등으로 물가가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연준이 금리를 올리면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다른 국가들에서는 자본 유출이 불가피하다. 이를 막으려면 다른 나라들도 연준을 따라 금리를 올려야 하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 한국도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한은의 통화정책은 정부로부터는 독립했지만, 연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것도 어쩌면 냉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속내를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연준에 맞서지 말라’는 월가의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원·달러 환율 상승, 금리 인상으로 인한 가계와 기업의 고통 증가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연준의 긴축정책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고, 세계의 리더국인 미국이 이래도 되는 건지 야속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정부의 무능과 실패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대외변수의 영향이 강하다 해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주어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원화 가치 하락세가 다른 나라 통화에 비해 지나치게 빠른 건 한국경제의 규모와 능력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 최근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속도는 유럽연합이나 중국 등 주요국 통화는 물론이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통화보다도 빠르다. 정부가 안정된 경제리더십을 보여준다면 외국인투자가들의 신뢰가 높아지고 원화 가치를 방어할 수 있다. 당국자들이 ‘외환시장 쏠림현상 주시’ ‘필요시 시장안정조치’ 같은 실효성 없는 메시지만 발신해서는 경제 주체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다. 행여 시스템 위기로 이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대기업 수출에 유리한 환율 상승을 용인하겠다는 의도를 정부가 갖고 있다면 반서민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수출 대기업을 위해 원화 가치 하락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그 고통이 서민에게 전가됐던 경험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마냥 지켜볼 수 없는 데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서라도 한은은 금리 인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 관건은 금리 인상이 가져올 취약계층에 대한 타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인플레는 금리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공급 문제에서 유발되고 있으며 수년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한은의 금리 처방만으로는 넘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는 할당관세 인하, 유류세 인하, 농축산물 비축물 방출 등 과거 물가급등기의 일회성 대책만 내놓고 있을 뿐 인플레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정책은 별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긴축은 거시경제적으로 필요하다 해도 저소득층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사회에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부는 서민생활 안정을 중심에 두고, 위기 극복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는 재정건전성에 집착해서는 나올 수 없다. 인플레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금리 인상과 긴축 재정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타당성이 있지만 지금은 물가가 오르면서 경기가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고조되는 시기다.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가 긴축재정을 한다며 통화량 증가 요인인 감세를 내세우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감세도 법인세, 상속세, 종합부동산세 등 부자감세에 치우쳐 있다.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희생은 늘 경제적 약자들의 몫이었다. 긴축의 시대에 요구되는 정부의 덕목은 따뜻함이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okc@kyunghyang.com>

 

 

연재 | 에디터의 창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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