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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이 흰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새 날아간 자리 가지처럼 파르르 눈동자 떨리던 사람
바스락거리는 별을 끌어다가 반짝, 담배에 불붙이던 사람
산등에 걸린 달을 눈으로 담은 사람
흙 파인 돌계단에 앉아 찬찬히 처마의 달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뒹구는 바람을 끌어다가
옷깃 안으로 여미던 사람
문득, 돌아선 곳에서 나를 달빛 든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
그 사람
바라보다가 고라니 까만 눈으로 바라보다가 잡으려 하니
그 자리에 별이 스러졌다
박경희(1974~)
어떤 것은 눈에 들어오고 또 무엇과는 눈길이 마주친다. 시인은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고 그 사람이 만나고 바라보고 있는, 접촉하고 있는 것들을 함께 감각한다. 그 사람은 갈바람, 별, 달과 달 그늘, 바람 등을 느끼고, 시인도 함께 이것들을 감각한다. 그러나 시인이 그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 사람은 형체가 차차 희미해지며 없어진다. 아마도 그 사람은 옛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이 했던 과거의 어떤 한 행위를 통해서 혹은 되풀이한 행위를 통해서 그 사람을 기억하기도 한다. 옷매무새와 손동작과 특유의 억양과 말투, 그리고 쓸쓸한 시간 속에 있을 때의 뒷모습 등으로 그 사람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했던 행위를 기억해내는 일은 그 사람의 크고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하고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달빛 든 눈”과 “고라니 까만 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은 이 가을에 물들어가는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보고 싶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