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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난 게 아니라
도착한 거예요.
추운 생명으로 왔지요.
추운 몸으로 왔어요.
그때가 아마 늦은 밤이었지.
북극의 생모(生母)가 찾아왔어요.
눈 포대기에서 보채는
동생들을 안고 얼음을 짜 먹이며
얼음의 말로 말을 가르치듯.
이 밤 어느 웅덩이에 고여 있을
그대들.
수없는 밤 고여 있었을 그대들.
머리맡에 밤바람이
주저리주저리 한 말.
그 밑바닥 말.
바닥에 가 닿은 말.
그대를 잉태했던 북극의 어머니가
평생 물걸레질한 그 얼음 바닥의
무늬가 손금에 박힌 것처럼.
굴복할 수 없는 무의 물결처럼.
궁핍처럼 스스로를 더 강하게
얼려야 하는 얼음처럼.
조정권(1949~201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정권 시인은 세속의 시를 고독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라고 쓴 시 ‘산정묘지 1’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일생(一生)의 시편들은 속악한 물신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신의 드높음을 노래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인간 본래의 가난함을 노래한다. 우리 존재가 “추운 생명”이요, “추운 몸”이라고 말한다. 말함으로써 우리 본래의 외로움과 적막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격조, 고고함, 염결(廉潔), 견딤, 정신의 고요하고 청빈한 산정(山頂)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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