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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은 비운의 세자다. 2002년 12월21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갔다. 안희정도 불렀다. “국민 앞에 털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미리 다 털고 가자.” 안희정은 1994년 노무현을 만난 이후 줄곧 살림을 담당했다. 안희정은 대선자금 수수 총대를 메고 구속됐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문재인은 “안희정은 정말 가혹하게 당했다. 본인 책임이 아닌 일까지도 안아버렸다. 민정수석으로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문재인의 <운명>).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정부로 입성할 때 안희정은 바깥에 혼자 남았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 한번 하자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안희정은 “본진은 앞으로 출발하고 나 혼자, 다리 부상 입은 놈이 혼자 남아 추격꾼들을 맞는 심정이었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안희정은 참여정부 내내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일등공신은 안희정이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결과 문재인·안희정·이재명 등 민주당 세 주자의 지지율 합은 56%로 당 지지율(47%)보다 높다. 세 주자는 지지층을 서로 뺏고 빼앗기기보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 안희정은 중도·보수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이들을 야당으로 끌어왔고 누수를 막았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반기문·황교안의 이탈표도 흡수했다. 안희정의 등장으로 민주당 후보들의 지지율 합은 2, 3월 두 달간 최저 46%에서 최고 61%로 안정적 박스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안희정이 없었다면 민주당 후보들이 지지율 파이를 키우면서 플러스섬 게임을 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MBC에서 진행한 100분 토론 녹화에서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어제 호남은 문재인을 선택했다. 문재인(60.2%)과 안희정(20%)의 표차는 컸다. 호남 경선은 야권 지지 민심의 바로미터다. 호남은 될 사람, 본선 가능성을 본다. 전략적 투표다. 그래서 호남 1위는 민주당 적통 이미지를 갖는다. 남은 충청·영남·수도권도 비슷할 것이다. 역대 야당 경선에서 수도권은 호남 동조투표 양상이 뚜렷했다. 문재인의 대세론은 확인됐다. 이대로라면 문재인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다.

관심은 경선 이후다. 세 주자들의 지지율 합이 본선에서도 문재인 지지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각 후보 지지자들이 적대적 관계가 되지 않아야 한다. 5년 전 대선에서 문재인·안철수 단일화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안철수의 앙금을 풀지 못한 때문이다.

안희정은 문재인에게 화가 나 있다. “질리고 정 떨어지게 한다”고 했다. “30년 민주당에 충성한 안희정을 배신자로 만드는 게 동지들의 우정이냐”고도 했다. 앵그리 안희정은 등 돌린 안철수보다 더 무섭다. 호남 경선 직전인 지난 주말 오후 안희정에게 물어봤다.

-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문재인 캠프는 나의 성향, 가치, 소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를 국정농단 세력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무원칙한 정치인이란 프레임을 씌워 두들겨 팼다. 동지들 간에 너무 심했다. 밑에서 여론을 만들면 문 후보는 추임새를 넣었다. 배신감 때문에 서운하고 화도 났다.”

- 경선 이후에 다시 합칠 수 있나.

“당연하다. 싸우더라도 다음날 다시 만나는 게 친구요 동지다. 각자 이기려고 하는 것인데, 정치에선 그런 걸 마음에 두면 안된다. 다만 현직 도지사라는 게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경선에 실패하면 도지사를 계속해야 한다. 그만두는 걸 도민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경선 최종 결과는 어떻게 전망하나.

“관건은 수도권이다. 여론조사 결과 문재인·안철수 차이는 12% 정도다. 위험하다. 하루에 뒤집어질 수 있다. 안희정·안철수 격차는 21%다. 두 배나 차이 난다. 야당 지지자들은 이제 ‘누구를 내놔도 이긴다’에서 ‘누가 확실하게 이길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섰다. 안희정이 정권교체의 확실한 승리의 카드라고 설득할 것이다. 지지자들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 (경선에 지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3선에 도전하는가.

“그건 경선 끝나고 적절한 시점에 제 입장을 밝히려 한다.”

안희정은 38살에 대통령을 만들었고, 53살에 대통령에 도전했다. 첫 도전에서 그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분법을 넘어 통합과 협치의 리더십도 선보였다. 경선에서 이기면 대권으로의 거보(巨步)를 내딛겠지만, 지더라도 많은 정치적 수익을 챙겼다. 어느 쪽이든 흑자다. 비운도 끝나는 것 같다. 안희정에게 박수를 보낸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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