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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도 못했던 일의 연속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민들에게 끌려 내려오고 파면되고 감옥에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겨울 대통령 선거가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봄날로 앞당겨질 거라고 짐작이나 했는가. 북한 김정은 정권에 급변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했지만, 정작 제 발 밑이 먼저 꺼질 줄 박근혜는 꿈에라도 상상했겠는가. 온통 처음 보고 처음 겪는 일투성이다. 한국 정치 사상 대선이 야야 대결로 치러지는 것도, 영남과 호남의 몰표가 노·장·청으로 갈가리 찢어진 것도 처음이다. 안철수가 보수의 새 아이콘으로 떠오르리라고, 그 보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지율 1위를 턱밑까지 치고 올라설 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초현실적인 대선판이다.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어지럽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정치의 낡은 패러다임이 깨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알리는 전주(前奏)일지 모른다. 징후는 여러 가지다. 첫째 30년 동안 영호남 지역 기반에 안주해온 거대 양당 체제가 붕괴되고 있다.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오만과 횡포 속에 나라가 결딴날 뻔한 위기를 몇 차례나 겪으며 시민들은 정치적 무능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가슴만 쳐오지 않았던가. 둘째 단일화 쇼도 사라졌다. 대선 때마다 후보 단일화를 모든 가치의 우위에 놓고 매달렸던 건 이젠 부끄러운 기억이 됐다. 셋째 구(舊)보수는 ‘강퇴(강제 퇴장)’ 직전이다. 진보는 친북이고 반국가로 명명됐던 시절, 빨갱이 낙인이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는 데 백전백승 언제나 잘 먹혀들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다. 이젠 유승민류(類)의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가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넷째 시민주권시대의 개막이다. 시민들은 역사상 최초로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렸다. 한국 민주주의는 더 이상 역진 불가능한 단계에 올라섰다. 믿겨지는가 이 모든 변화가. 최장집 교수는 “반세기 이상 한국 정치와 사회를 떠받쳐왔던 이념과 가치체계의 해체를 뜻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건 한국도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흡사 마주 보는 거울 같다. 미국 언론들은 힐러리 클린턴을 공공연히 지지하며 우세를 점쳤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뉴욕타임스는 “변화의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한국도 보수 언론은 드러내놓고 안철수를 지지하고 있다. 반문재인 전선을 만드는 데 전력이다. 안철수가 예뻐서가 아니다. 문재인이 싫어서다. 미국 대선 여론조사는 민심을 읽는 데 실패했다. 속내를 제대로 밝히지 않는 응답자, 이른바 ‘샤이 유권자’의 진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김춘석 한국리서치 이사에게 물어봤다.

-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들은 믿을 만한가.

“공신력 있는 주요 여론조사 결과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총선과 달리 전국 단위 대선 예측은 심플하다. 실제 결과와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 한국도 ‘샤이 유권자’들이 있는가.

“유권자들은 현재 지지 후보를 거의 다 정했다. 무응답은 6% 정도. 이들은 투표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로 봐도 된다. 여야가 강력히 맞서야 속을 숨기는데 지금 구도는 샤이할 이유가 없어졌다.”

- 지금 여론은 어떤가.

“이번주 초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대체로 7%P 격차다. 문재인 지지층이 모이고 있고, 안철수는 흔들리고 있다. 안철수 지지율은 기존 지지층에 안희정 등 다른 후보 지지층 이탈, 부동층에서 넘어온 지지를 다 합한 것이다. 여러 계층이 섞여 있다. 상황에 따라 변동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은 기존 지지층에 안희정·이재명 이탈표로 구성돼 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변동 가능성이 거의 없다.”

- 남은 20일 동안 변수는 뭔가.

“현재 지지하는 후보를 바꿀 수 있다는 응답자가 26%다. 연령으로는 20~30대가 많고 성향으로는 중도·보수층이 많다. 이들이 지지 후보를 바꿀 것인지, 바꾼다면 누구에게로 갈 것인지가 가장 큰 변수다.”

정권교체는 확실하다. 문재인·안철수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정권교체의 질(質)이다. 국정농단의 주역 우병우, 부패 언론인 송희영, 400억 공짜 주식 진경준 같은 무리가 다시 활개치는 세상이 새로운 나라일 수는 없다. 수구세력의 저항은 강고하다. 복싱에서 클린치는 불리하면 껴안는 수법이다. 기득권의 클린치는 반성도 참회도 없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죄를 오늘 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죄악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정권교체를 할 것인가, 이제 결정해야 한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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