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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될 일이 없으니까 그런 꿈은 안 꿔도 된다.”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 초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 말을 한 홍준표 후보의 당선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다. “친북좌파” “강남좌파” 막겠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보수층에게도 힘이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퇴하지 않겠다는 건 ‘보수의 씨감자’를 남겨두기 위해서일 게다. 다른 후보는 새로운 보수의 싹을 틔우거나 진보적 의제를 설파하기 위해 완주할 태세다. 당과 후보의 정치적·정책적 비전이 이번 대선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까지 내다보는 것이다.

한국 정치를 오랫동안 규정했던 양당 구도가 국민의당 등장으로 세 축의 대결구도가 되나 싶었더니 가장 강했던 한 축이 허물어졌다. 헌정사에 언제 이렇게 보수가 궤멸해서 야당 후보끼리 양강 구도를 이룬 적이 있었던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기묘한 대선이다.

이번 대선 승자는 둘 중 한 명이다. 문재인이냐, 안철수냐. 문 후보는 대선가도에 안 후보라는 5년 전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피할 길은 없다. 안 후보는 당 지지율보다 2배가량 높은 개인 지지율이 보여주듯 여기저기 유권자들을 모아 유력 주자 지위에 올랐다. 정점을 찍은 것 아니냐, 그들이 투표장에 갈 거냐, 그건 봐야 할 일이다. 역대 대선에서 선거운동이 시작될 즈음 지지율 우열이 대선 승패 결과와 같았다는 분석도 있지만 워낙에 초유의 구도이다보니 결과를 예단키 어렵다. 현재 지지율은 빡빡하게 붙어 있고, 여러 정황상 이런 흐름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권력의지’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적임자,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유권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정치판에선 ‘긍정의 언어’로 인식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박근혜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권력의지 때문”(전여옥 전 의원)에 국정을 망가뜨렸고, 전두환은 “(5·18과 12·12는) 사적인 권력의지가 아니라 운명적 선택”(<전두환 회고록>)이라고 궤변을 늘어놨다. 이들에게 권력의지는 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을 세뇌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문·안 후보 모두 5년 전 ‘정치 초짜’ 시절에 ‘권력의지가 약하다’고 평가됐다. 문 후보는 자발적 의지보다 불려나온 측면이 강했고, 안 후보는 서울시장에 이어 대선후보를 양보해 그런 인상을 줬다. 두 사람은 5년 전보다 권력의지가 커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문 후보는 3%포인트 차 패배로 박근혜 정부를 만들어줬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한다. 안 후보는 나라 바꾸는 것에 비하면 목소리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라며 ‘강철수’를 자처한다. 지금 두 사람의 권력의지는 충만하다.

누가 되더라도 박근혜 덕분이다. 박근혜의 무능, 부패, 독선의 농단이 없었다면 두 사람이 지금처럼 양강 구도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탄핵’은 정권교체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촛불민심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이권을 나눠먹는 ‘기득권 동맹’을 깨달라, 이를 뒷받침해온 권력기구들을 제자리에 놓아달라, 그 과정에서 소외당한 이들의 한숨과 절망에 귀 기울여달라고 한다. 그래서 다음 대통령에겐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적어도 그 초석을 놓아야 한다는 임무가 부여된다. 대선후보들이 가장 먼저 확인시켜야 할 권력의지는 이것이 돼야 한다. 회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다.

다들 그러겠노라고 얘기한다. 적폐청산을 앞세우는 문 후보든, 통합을 앞세우는 안 후보든 마찬가지다. 청산과 통합은 다음 정부에서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지만 22일 동안 둘 중 어떤 이슈가 공감대를 더 얻느냐가 승부를 가를 것이다.

권력의지를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는 버리는 것이다. 손에 쥔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꺼운 희생을 마다하면서 다 가지겠다면 의지가 아니라 욕심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문 후보도 안 후보도 확장 일변도다. 버리기보다 하나라도 더 챙겨 덩치를 키우려 한다. 본선이 다가오면서 영입전에 사활을 거는 것은 하나의 예다.

문 후보가 눈에 띄는 무엇을 내려놓은 것은 없다. 상황이 다급해지면 카드를 꺼내놓을까, 아직은 없다. 지난 대선 때도 막판에 몰려 ‘지도부 총사퇴 선언’이라는 조치 정도에 그쳤다. 안 후보는 후보등록을 하면서 의원직을 사퇴했다. 5년 전 문 후보가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했던 터여서 안 후보의 사퇴는 예견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의원직 사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자기희생의 배수진치고는 감동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다.

비워야 채운다. 말보다 행동이 필요하다. 22일 남은 대선까지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안홍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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