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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온 산천에/ 종환(腫患)들이 떼지어 솟아/ 터진다/ 피고름이 터진다// 무섭다”

‘꽃’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쓴 시다. 봄이 일찍 도래했기 때문일까. 올봄의 꽃들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울안의 매화 산수유가 터지더니 호숫가를 따라 벚꽃들이 줄지어 터져 나오고, 건넛마을에서 앵두 자두 복숭아 배꽃 조팝나무 살구 등이 도미노로 줄지어 소리치고 나선다. 겨울의 혹한을 견뎌내느라 미상불 속새로 고열도 나고 통증도 참았을 터이다. 그러니 결과로서의 꽃이야 애오라지 부시고 고울망정, 그 과정으로서의 어둠 속에서야 잔인하고 피어린 고투(苦鬪)가 왜 없었겠는가. 저것은 분명 금기를 깨치고 터져 나오는 못 말릴 색정이요, 천상을 건들 만한 존재의 나팔소리인 것이다. 관념이 아니다. 실제적인 빅뱅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시도 나는 쓴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저 물로 살아야지/ 강물 되어야지/ 그대 꽃으로 피면/ 품고 흘러야지/ 먼 바다 끝으로 가서 기쁘게 하늘로 오르고/ 외로우면 새봄에 봄비로 내려/ 그대 정결한 이마/ 부드럽게 적셔야지/ 따뜻이 스며들어야지”

봄꽃들 때문에 바야흐로 내 감수성이 하늘을 찌른다.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누군들, 횡격막 아래 억눌러 감춰놓은 ‘시인’이 왜 없겠는가. 제 안에 억눌려 있던 ‘시인’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꽃으로 피었다가 꽃비로 지거니와, 그러므로 그 상승과 추락 사이에서 내 슬픔은 냉큼 초월에까지 이른다. 상승과 추락의 단애가 봄이라 할 만하다. 활상(滑翔)의 여유를 즐길 사이도 없다. 피는 것은 꽃의 활생이요 지는 것은 꽃의 죽음이라, 그 사이가 가히 면도날이다. 바르도다.

삶은 말할 것도 없이 실제와 초월 사이에 있다.

세상은 오늘도 우리에게 크고 작은 ‘빨대’를 하나씩 들려주고 저기, 불안한 소비의 정글로 밤낮없이 몰아내는 중이다. 큰 ‘깔때기’를 가진 자들도 있다. 소설 <소금>에서 말한바, 자본주의체제는 ‘빨대와 깔때기의 거대한 네트워크’라고 할 것이다. 누구는 ‘빨대’를 들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동분서주하지만, 거대조직의 드높은 망루 위에 앉아 있는 누구는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빨대’들을 낱낱이 내려다보며 보다 주둥이가 넓은 ‘깔때기’로 수천수만의 빨대를 일시에 빨아들인다. 국가조직, 다국적, 재벌 기업들이 그렇다. 먹이사슬이 절멸하면 안되기 때문에 ‘깔때기’로 빨아들인 것을 얼마큼 토해내야 오래, 그리고 보다 더 많이 확대 재생산해낼는지도 저들은 계산한다. 문화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정치가 명분을 대주니까 드높은 저들 망루의 안전성은 지속적으로 보장된다. 불과 반세기 전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정교한 프로그램이다. 바야흐로 지구인 모두가 생산성 제고의 노예가 된 세상이지 않은가.

차밭, 봄꽃이 어우러진 봄 풍경 (출처 :경향DB)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우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만이 두통이라는 병을 갖고 있으며 사람만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삶의 유한성이 주는 슬픔을 이해한다. 인류문화를 지속적으로 진보시켜온 근원적인 에너지가 거기 있다. 실용적 세계의 진보에 욕망을 두면서, 동시에 그 실용 너머의 신비하고 한정 없는 초월적 세계를 보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이를테면 사람만이 ‘시’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산성의 목표치를 제공해 오로지 그에 헌신하라는 ‘빨대와 깔때기’의 체제가 아무리 견고하고 거대해도, 끝내 우리들 가슴속에 숨겨진 ‘시’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본성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원자핵에 그것이 DNA로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것이 어찌 목숨뿐이겠는가. 사랑과 행복, 그리고 신의 옷깃을 잡고 싶은 갈망도 그러하다.

행복해지기 위해 소비가 지금 부족한가.

혹시 울지 못해, 화내지 못해,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불행한 것은 아닌가. 눈물과 소리침과 키스가 바로 시일 터이다. 봄꽃의 발화와 그 정결한 낙화를 보라. 제 안에 분명히 실재하는 것들을 한사코 부정하며 가는 진군은 소비라는 이름의 화려한 재화의 감옥에 우리를 가둘 뿐이다. 육체도 영혼도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다. 당신은 본래 ‘시인’이 아니었던가. 가장 감추기 어려운 것은 기침과 사랑에의 불꽃일 것이다. 그걸 한사코 감추라고 명령하는 생산성 제고는 행복을 위한 하나의 축에 불과하다. 그것을 행복의 전부라고 말하는 체제는 속임수로서의 전략을 가졌을 뿐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당신 가슴속에 깃든 ‘시인’을 멸절시키려는 체제엔 당연히 저항하는 게 옳다. 가슴속에 억눌러 숨긴 ‘시인’이야말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세계화라는 명패를 든 신자유주의의 ‘목줄’에 속이 뒤집혀 쓴 이런 시도 있다. “우리집 젊은 개는/ 어쩌다 목줄 풀어주면 아주 미친다/ 나는 너무 반듯하다/ 사랑하는 그 누구도 나의 목줄을 풀어주는 일 없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아주 미친다”

논산 외딴집에서 나는 늘 ‘영원’을 생각한다.

사람처럼 징글징글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그리운 것이 없다. 산하에 꽃이 가득하니 그리움은 나날이 키가 큰다.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쓴 내 졸시의 전문은 이렇다. “이제 아무도 순간을 버리면/ 영원을 얻는다고 믿지 않네 꿀벌들은/ 오늘도 은방울꽃 작은 향랑에 대롱을 박고// 황홀한 긴꼬리제비나비는 산초나무 어둔 가슴에/ 새똥 같은 알을 낳는다 누가/ 새똥 속에 영혼의 각성이 깃들여 있는 줄 알겠는가// 당신은 영원으로부터 와/ 내 영혼의 뜨락에 순간의 불씨를 놓고/ 지금 사랑이라고 부르네 프시케(Psyche)라고// 등이 가슴보다 어두운 당신”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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