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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틴’이라는 여성이 있다. 한 남자를 사랑했으나 곧 버림받고 홀로 딸 ‘코제트’를 낳는다. 딸을 직접 기를 수 없자 한 여관에 맡겼다.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을 매달 딸에게 부쳤다. 어느날 공장 반장의 성희롱에 항의하다 해고된다. 더 이상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그녀는 몸을 판다. 그렇게 번 돈을 코제트에게 보낸다. 성을 구매하려는 선원이 괴롭히자 저항한다. 자베르 경감은 다짜고짜 그녀를 붙잡는다. 그녀는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얘기다.

지난달 25일 경남 통영에서 한 티켓다방 여성이 자살을 했다. 경찰이 티켓다방에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매춘을 유도했다. 그녀는 “옷 좀 입게 나가달라”고 요청한 뒤 모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미혼모였다. 이곳에서 번 돈을 매달 고향 아버지와 딸에게 부쳤다. 그녀의 사연을 듣는 순간 팡틴이 떠올랐다.

경찰은 심드렁하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티켓다방 홍보전단을 보고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함정단속’이 아니란다. 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범죄를 유도하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경찰은 이런 식으로 22명을 단속했다고도 했다. 경찰의 눈에 그녀의 인권은 애초에 없었던 것 아닐까. 그녀는 성매매단속의 실적치를 나타내는 숫자 1,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수 있다.

격무에 시달리는 경찰을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화를 삭일 수 없다. 경찰이 아니라 우리 사회 때문이다. 왜 하필 그녀만 죽어야 했을까. 그녀를 내보낸 포주는 문제가 없었나. 성매매가 의심되는 여성에게 매춘을 유도하는 것처럼 성매수가 의심되는 남성들에게는 왜 유도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영화 <레미제라블> (출처 : 경향DB)


그녀는 사회적 약자였다. 어떤 식으로 처리해도 돌 던질 사람이 없다. 그녀는 몸파는 여자였고, 여론은 정의로운 경찰편이었다. 반면 포주는 그녀보다는 부담스럽다. 지역유지일 수도 있고, 조직폭력배가 뒤에 있을 수도 있다. 성매수 의심이 가는 남성들은 경찰이 상대하기 더 어렵다. 괜히 유도전화를 했다가는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필요한 건 단속실적이었을 것이다. 실적은 만만한 대상에게서 채우면 된다.

어디 그녀만 그렇겠나. 한국사회는 약자에게 냉혹하다. 많은 것을 가진 강자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게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약자에게 그것마저 내놓으라고 한다. 기업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노동자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아파트 주민의 폭언에 견디다 못해 한 경비원이 자살하자 입주민들은 이 경비원이 소속된 회사의 경비원 모두를 잘랐다.

화룡점정은 정부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한다며 노동자 간 싸움을 붙이고 있다. 최경환 경제팀은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로 기업이 겁이 나 (인력을) 못 뽑는 상황”이라고도 했다. 그에게는 당장 연말까지 잘려나가는 수백명의 금융권 노동자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정년을 60세까지 보장해줬으니 (쉬운 해고가 가능토록 해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부총리의 발언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정작 힘있는 자는 사상최고의 유보자금을 축적한 기업이지만 손댈 엄두를 못 낸다.

참다못한 대학생들이 학내에 대자보를 붙였다. 이른바 ‘최씨 아저씨께 보내는 협박편지’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통해 “아저씨, 다 같이 망하자는 거 아니면 우리 같이 좀 삽시다”라고 외쳤다.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1862년이다. 160여년이 지난 2014년. 한국사회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상황은 더 나쁘다. 팡틴에게는 장발장이 있었지만 한국인들은 그마저 없다. 자베르 경감만 득실하다. 한국사회의 서민들은 누구에게 기대야 하나. 체한 듯 명치 끝이 답답한 이유다.


박병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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