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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진짜 이거는 바꿔야 됩니다. 1심 2심 3심까지 가면 몇 년 걸리잖아요. 사장이야 오래 끌수록 좋겠지만 회사에서 잘린 노동자는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딥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야 한다니까요 정말.”

지방의 한 노동조합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중년의 노동자가 수차례 반복했던 말이다. 해고의 부당함을 확신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부도덕한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비용을 줄이고 싶거나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직원들이 있다면, 해고하면 된다. 법은 부당한 해고를 못하도록 하지만 법이 최종적으로 부당성 여부를 판단하기까지는 해고 상태가 유지된다. 부당 해고가 아니라는 최종 판결이 나오면 좋고, 부당하다고 하면 그때 가서 복직시키면 된다. 욕먹는 것만 감수하면 크게 손해날 일이 없다. 물론 소송에는 돈이 들지만 인건비 절감액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반면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한 해고 노동자에게는 소송 비용 대기도 벅차기만 하다. 법은 평등하지만 판결을 받기까지의 부담은 평등하지 않다.

명진 스님은 최근 케이블 설치·수리 노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회사가 어렵다며 나가라는 것은 굶어 죽으란 소리다. 예전처럼 농사짓는 시대도 아니고, 일이 세분화돼 있어서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사실상 봉쇄됐다. 20여년이 흘러 민주화되고 경제가 발전했다지만 2009년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택 바닥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서” 일자리를 찾아 타지를 전전하다 쓸쓸한 죽음을 맞기도 했다.

오는 11일이면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2000일을 맞는다. 눈뜨면 절망인 날들을 2000번이나 견뎌냈다. 쓰러져 있는 이들은 수십억원의 손해배상 판결로 다시 한번 짓이겨졌고 동료와 그 가족들의 잇따른 부음은 가장 힘든 고통이었다. 아예 다 잊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고는 부당했기 때문에 버티며 싸웠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의 근거가 됐던 회계 자료들이 엉터리였다.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의 ‘해고 무효’ 판결에서 인정한 유형자산손상차손의 과대계상의 핵심이다. 쉽게 말하면, 향후 생산 설비(유형자산)에서 예상되는 매출이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해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회계에 반영했던 것이다. 기존 차종을 단종시키고 후속 신차는 개발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이 전제대로라면 회사를 접겠다는 의미여서 앞뒤가 맞지 않다. 회계는 숫자의 정확성이 생명인데 감사조서(감사보고서의 기초 자료)와 감사보고서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았다. 감사조서에는 작성한 회계사의 서명조차 없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소송 최종 선고(13일)를 앞둔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무효판결'을 바라는 2천배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쌍용차 정리해고 2002일째인 오는 13일 대법원의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그동안 형극의 시간들을 살아냈던 것은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 이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함에 대한 가슴속 깊은 분노와 저항이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괜히 겨울이라고 답하곤 했다. 군대에 가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없는 사람들에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겨울 바람은 잔인하다. 그 바람은 몸을 지나 마음까지 얼어붙게 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올해 겨울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봄 같은 겨울이 될지, 아니면 더욱 혹독한 겨울이 될지는 11월13일 결정난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과 신뢰의 둑이 무너진 듯하다. 영혼을 잠식한다는 불안만 커져간다. 대법원의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만큼은 상식의 선을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박철응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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