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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대법원은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이 적법하다는 판단을 내놨다. 아스팔트에서, 농성장에서, 법정에서 5년 넘게 싸워온 153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바람 찬 거리에서 다시 기약없는 싸움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5년간 25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져내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쌍용차 해고자들이 2000일 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와 가족과 동료의 삶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들의 마음을 밝히던 희망의 불빛을 야멸차게 꺼버렸다. 승리의 전망은 흐릿해졌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별의별 것과 싸워왔는데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남은 해고자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조정실장인 이창근씨가 대법원 선고 직후 한 말은 이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막막함, 절망의 깊이를 보여준다.

대법원의 판결문에 적힌 언어는 짧고, 단순하고, 건조하다. “정리해고를 단행할 만한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가 있었다” “예상매출 추정이 합리적이고 객관적 가정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추정이 다소 보수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합리성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 운영에 필요한 인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잉여인력은 몇 명인지 등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나열돼 있다. 2심을 뒤엎는 판결이라면 2심과 달리 판단한 구체적 근거를 제시할 법도 한데, 판결문을 눈 씻고 뒤져봐도 없다. 대법원의 권위에 기댄 친기업·반노동 가이드라인, 또는 ‘사법적 판단’보다 ‘정치적 결단’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대법원의 판결이 있던 날은 공교롭게도 전태일 열사 44주기였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열사가 제 몸을 불사른 지 44년이 지났지만 오늘 노동이 처한 상황은 춥고 엄혹하다. 정리해고에 맞서, 비정규직 처지에 절망해 목숨을 버리는 노동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평화시장 ‘시다’의 눈물은 의류업계 인턴의 눈물이 돼 오늘도 마를 날이 없다. 파리 같은 목숨에 중노동·저임금이 서러워 노조 좀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가 재계약을 거부당하거나 회사가 폐업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얼마인가. 한 번 찍히면 업계에 소문이 돌아 영영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까봐 숨죽이며 일하는 인턴은 또 얼마인가.

13일 대법원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한 무효확인소송에 대해 '해고는 유효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판결 후 대법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저 참혹한 독재 시절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게 있었다. 민주화가 되고 민주노조가 만들어지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때 ‘노동’이라는 어휘에는 ‘불온’과 ‘천대’의 어감과 함께 어떤 ‘신성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노동’은 경멸의 언어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해악 중 하나는 ‘노조’를 악마화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을 외면했다고 정규직 노조를 욕하면서, 정작 비정규직과의 연대에 헌신적인 노조 간부나 활동가는 ‘외부세력’이라고 비난한다. 이런저런 구실을 둘러댈 뿐 이들이 말하고 싶은 바는 하나다. ‘노조는 싫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비정규직이나 저소득층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지만 온정주의의 수인한계는 분명하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에 머물 때는 너그럽지만 ‘권리의 주체’로 나서는 순간 온갖 공격이 가해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법원의 판결도 이런 시류를 반영한 것일 터이다.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는 노동자이고, 어떤 권리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의 상황이 엄혹하다는 건 노조 바깥에 있는 90%의 노동자를 권리의 주체로 묶어세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사회적 의제가 됐다는 의미다. 절망이 깊을수록 먼 미래를 내다보고 첫걸음을 떼야 한다. 다시 문제는 ‘조직화’다.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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