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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봄 스페인에서 다수의 독감환자가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노동자들이 귀국하면서 독감을 퍼뜨린 것이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를 포함해 많은 각료들도 감염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성이 약했기 때문에 ‘스패니시 레이디’라고 불렸다. 당시 언론통제가 약했던 스페인에서 집중적으로 독감문제가 다뤄졌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으로 세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스페인 독감은 8월이 지나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강력해졌다. 숙녀가 괴물로 바뀐 것이다. 전염지역도 아프리카와 유럽뿐 아니라 인도, 중국, 한국에까지 확산됐다. 이른바 판데믹(대유행)으로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가장 타격을 입은 국가는 남부 유럽과 동남아시아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9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742만명의 환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독감환자는 인구의 25~50% 정도로 추정됐다. 매일신보는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14만명에 이른다고 했다. 이 수치도 열악했던 통계 시스템을 감안해야 한다. 얼마나 피해가 컸던지 가을에 추수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5000만~7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세계대전 사망자보다 3배나 많다.

스페인 독감은 이전 전염병에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만들었다. 먼저 전염병의 세계화다. 이전에도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많았다. BC 5세기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유행병으로 그리스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죽음의 수렁에 빠졌다고 적었다. 서기 165년 전염병은 로마를 텅 비게 만들고 안토니우스 황제의 목숨을 앗아갔다. 514년 역병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0%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14세기에는 흑사병이 돌아 유럽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이들 역병은 파괴적인 독성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전염병은 아니었다.

스페인 독감은 전염 속도에 가속엔진을 장착했다. 선박과 철도는 빠른 속도로 세계에 희생자를 만들었다. 스페인 독감은 기계화된 이동수단을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인간 또는 소나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기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1918년에 한국에 퍼진 스페인 독감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전염병의 세계적 전파의 퀀텀점프는 비행기의 출현이 가져왔다. 비행기는 빠르고 멀리 전염병을 실어나를 수 있다. 전염의 세계화와 동시화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2003년 초 중국 광저우에서 발생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비행기의 능력을 입증했다. 사스 감염자가 머물렀던 호텔은 인큐베이터가 됐다. 호텔 고객들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로 전염병을 퍼 날랐다. 수개월 만에 30여개국에 8200여명의 환자가 나왔고 770여명이 사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이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27일 현재 중국에서만 2744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도 80명에 달했다. 중국 당국의 조치에도 확산기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비행기는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유럽, 호주에 환자를 실어 날랐다.

신종 전염병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세계농업기구 관계자는 인간집단의 팽창, 자연서식지의 침범, 인간과 야생동물의 국간 이동과 뒤섞임, 자연 서식지와 생태계 교란, 가축과 야생동물의 동시사육, 야생동물 종 또는 야생병원체의 지역 간 이동, 기후변화, 광범한 항생제 사용 등을 꼽았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의학의 발달로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기대가 있다. 과학자들은 항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데 최소한 4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설사 백신을 만들어도 투약에 천문학적인 비용과 수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 사이 바이러스는 살기 위해 새로운 변이를 일으킨다. 인간의 노력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기침과 재채기는 반드시 입을 가리고 하라’든지, ‘손을 씻어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마라’ ‘피곤하면 쉬어라’는 대응책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향후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3대 요인으로 식량부족과 기후변화, 전염병 유행을 지목한 바 있다. 신종 전염병은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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