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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아이를 글에서 호칭해야 할 때 ‘김○○씨’라고 한다. 예를 들면 “김○○씨는 오늘도 나의 핸드폰을 세면대에서 열심히 씻고 있었다”와 같은 것이다. 그가 나를 ‘부글부글’하게 만든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종종 쓰기도 한다. 이것을 육아일기 단행본으로 출간하자는 제안도 몇 번 받았는데, 주양육자가 아닌 사람이 육아에 대해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것도 민망하고 무엇보다도 전쟁처럼 아이를 돌보고 있을 내 또래의 여성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기에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페이스북의 글을 본 사람들이 “왜 아이를 ‘-씨’라고 부르시나요, 남처럼 느껴지지 않나요?”하고 묻기도 한다. 아내도 나에게 “아이가 남이야?”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을 전한 일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이를 ‘-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말로 그를 남처럼 여기고 싶어서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만큼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다.

아이를 보면서 남들보다 빨리 걸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말을 빨리하면 좋겠다, 남들보다 키가 크면 좋겠다, 하는 욕망을 가졌다.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고 나면 남들보다 받아쓰기를 잘하면 좋겠다, 1등을 하면 좋겠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겠다, 대기업에 취직하면 좋겠다, 하는 것으로 그 욕망을 확장시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그 자신의 속도가 있을 텐데 나는 나의 기준에 그 속도를 맞추려고 한다. 그것은 나의 기준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기준일 것이고, 어쩌면 그보다도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기를 아이에게 강요해 왔을 것이다. 

이전에 청소년을 위한 ‘진로 박람회’에 강연을 하기 위해 간 일이 있다. 많은 부모들이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왔다. 그들이 나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은 “아이에게 좋은 직업을 찾아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평범하면서 동시에 훌륭한 부모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찾아주고 싶다는 말보다는 찾게 해주고 싶다는 말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진로 역시 아이라는 개인이, 그 타인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 되면 좋겠다는 부모의 마음이 결국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거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부모와 아이는 서로를 향해 한없이 수렴하는 존재다. 아이는 부모를 향해 다가가고, 부모 역시 아이를 향해 더욱 큰 보폭으로 걸어간다. 서로 다정하고 정답게 지내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나 가까워지고 나면 많은 부모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만다. 아이가 부모의 욕망대로 움직이기를,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기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계속 나의 아이를 ‘-씨’라고 쓰려고 한다. 그런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와 같은 평범한 부모는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싶어질 것 같아서다. 그것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야 할 그 대상이 결국 존중해야 할 타인임을 감각하기 위한 일이다. 그가 앞으로 겪을 어려움은 그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도정일 것이기에 나는 그를 가장 가까운 타인으로서 응원하고 싶다. 아이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존감을 가진 객체임을 늘 떠올려야 한다. 아이뿐 아니라 나와 소중한 모든 이들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온전히 선택하고 책임지며 자신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기준과 속도를 무시하는 폭력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2020년 새해에도, 나와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가까운 타인들이 행복하고 잘되기를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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