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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배타적인 슬픔

opinionX 2017. 7. 27. 10:44

내 오래된 글쓰기 습관 가운데 하나는 초고를 탈고한 뒤라면 그때가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상관없이 술을 한잔 마시는 거다. 그 이유는 내가 방금 쓴 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로부터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며 퇴고를 한다. 겨우 하루 이틀 만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듯 내가 쓴 글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술을 한잔 마시면서 글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던 게 퍽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술 마실 핑계에 불과하다는 힐난도 들어봤고 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다른 소설가들의 좀 더 고상한 습관을 배우지 못해 스스로도 아쉽지만 징크스에 민감한 운동선수처럼 이 습관을 지키지 못하면 글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탓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어느 토요일 새벽이었다. 소설 초고를 탈고한 뒤 집을 나섰다.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사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데 비해 상가구역이 협소해서 주말 새벽인데도 마땅히 술 한잔 마실 곳이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2㎞쯤 떨어진 번화한 지역을 찾아가야 했다. 그곳에 가려면 4차선 도로를 따라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고 길지 않은 터널도 지나야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수월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성업 중인 한 술집에서 고픈 배도 채우고 술도 한잔 마셨다. 토요일 새벽이라 술집에는 사람들이 그득했고 저마다의 기쁨, 슬픔, 고민, 희망 등을 동석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 틈에 홀로 앉아 자작하는 내 꼴이 아마도 처량하게 보였던지 내 부실한 안주를 걱정하며 자신들의 안주를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토요일 새벽, 술꾼 아닌 술꾼들로 가득한 술집에 앉아본 적 있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그 소리들, 젓가락질 하는 소리, 술잔 부딪는 소리, 술 따르는 소리, 권하고 말리고 받아들이며 실랑이하는 소리, 호언장담과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식의 고백투의 목소리, 웃다 울다 울다 웃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웃음과 울음들.

사실 내가 기꺼워 마다하지 않는 이 소리들에 둘러싸여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적어도 내게는 흥겹고 즐거운 일이며 방금까지도 곤두섰던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즐거웠다. 취기가 올라 한결 느슨해진 상태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차는커녕 사람 하나 없고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가면 그 새벽을 완벽하게 혼자 소유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저 앞에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의 양복은 후줄근해 보였는데 작은 키에 헐렁한 양복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오십대로 여겨지는 그 사내는 너무나 흔한 가죽 서류 가방을 든 채 비틀거리긴 했지만 부단히 앞으로 걸었고 비명을 지르는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그저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일 뿐이었다. 술집에서 보았던 사내 같았고 술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노래는 서글펐다. 그의 노래는 무척이나 배타적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온전히 몰두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였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일 그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술을 마신 게 아니었을까.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그를 떠나지 않던 걱정들에서 순수하게 풀려난 찰나의 순간. 그가 유일하게 그 자신일 수 있는 시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는 노래를 음정 박자 틀려가며 목청이 터져라 부를 수 있는, 그에게 허용된 아주 짧은 순간. 집으로 돌아가는 그 새벽. 나는 감히 그를 지나쳐가지 못하고 그와 거리를 둔 채 페달을 천천히 밟아가며 그의 구슬픈 노래를 들었다. 고독할 권리를 누리는 그를 손톱만큼이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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