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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목포 문화재거리 투기’ 의혹에 휩싸였을 때,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사람은 같은 당의 서영교 의원일지도 모른다.

지난 15일 손 의원이 자신과 지인들의 명의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있는 다수 건물을 매입했다는 SBS 보도가 나오자, 손 의원은 곧바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자유한국당이 ‘손혜원 랜드’라 명명하며 공세를 펼치자, 손 의원은 사실이 아니라는 데 ‘목숨’과 ‘전 재산’과 ‘국회의원직’을 걸겠다고 대응했다. 급기야 손 의원은 탈당을 선언하면서 검찰 수사를 의뢰했고, 투기 의혹이 사실이면 의원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서영교 의원의 ‘재판청탁’ 의혹 역시 손 의원의 ‘목포 문화재거리 투기’ 의혹과 같은 날 불거졌다.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추가 기소 내용이 밝혀지면서다. 사정당국은 서 의원이 2015년 5월 국회 파견 판사를 자신의 의원실로 불러 지인 아들 재판의 죄명을 변경하고 실형이 아닌 벌금형을 내려달라 청탁했다고 봤다. 하지만 각종 언론에 등장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힌 손 의원과 달리, 서 의원은 “죄명을 바꿔달라거나 선처해달라 이야기한 적은 없다”는 간략한 입장만을 내놓은 채 침묵하고 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민주당 역시 ‘재판청탁’ 건이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분위기다. 서 의원의 원내수석부대표직 자진 사퇴를 받아들이는 대신, 별도 징계는 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홍영표 원내대표는 “과거 법제사법위원으로서 민원을 받아서 관행적으로 좀 했던 것에 문제가 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세상엔 여러 가지 민원이 있다. 기획사의 지인을 통해 구하기 힘든 공연 티켓을 손에 넣으려 한다거나, 병원의 지인을 통해 실력 있는 의사에게 진료받을 시간을 앞당긴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조차 ‘공정’을 주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현재 한국 사회 분위기에선 시도하기 어렵다. 게다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 덕에 이러한 민원은 공무원, 언론인 등에게는 엄연한 불법이다.

‘재판청탁’은 차원이 다른 민원이다. 시민의 상식으로 볼 때, 판사는 따로 만나기는커녕 법정 먼발치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누구라도 판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법정에서 정당한 변론을 거칠 때의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가벼운 형을 받기 위해 시민들은 판사에게 읍소하고, 수십통의 반성문을 쓰고, 피해자와 합의하려고 노력한다. 국회의원은 그런 과정을 건너뛴 채 의원실로 판사를 부른다. 앞서 지난 양승태 대법원의 역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 법안’ 발의에 동참하는 ‘성의’를 보였으니 주고받은 셈이다.

홍영표 원내대표가 ‘민원’ ‘관행’ 같은 단어를 쓴 것을 보면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이 정도 일은 흔한 걸까. 실제 검찰 공소사실에는 서영교 의원 외에도 민주당 전병헌, 한국당 이군현·노철래 등 당시 다른 국회의원들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3권 분립을 명시한 헌법정신을 훼손하면서도, 그것을 ‘관행’이라 부르는 것이 한국 국회의원들의 윤리의식이다. 한국당이 손혜원 의원에 대해선 맹공을 퍼부으면서도 서영교 의원에 대해선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하는 상황을 보면, “거대 양당이 은근슬쩍 서영교 의원의 재판청탁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다”(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지적이 타당하게 들린다.

“공법 관계에서 정의의 여신은 눈을 번쩍 떠야 한다”는 말을 최근 들었다. 사사로움 없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두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의 모습을 살짝 비튼 말이다. 범행의 정도가 같더라도 피고인의 처지를 잘 살펴 각기 다른 수준의 합리적인 판결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가게에서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때, 일거리가 없어 며칠을 굶주린 사람에 대한 처벌과 스릴을 맛보기 위해 재미로 도둑질을 한 부잣집 청년에 대한 처벌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재판청탁’은 ‘눈뜬 정의의 여신’에게 자신의 금배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유권자가 부여한 권력을 사적인 청탁에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입법 권력과 사법 권력의 카르텔을 공고하게 한 사건이다.

인공지능(AI)의 등장과 함께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다. 법조계도 무풍지대가 아니다. 이미 미국의 한 로펌에서는 초당 10억건의 법률문서를 검토하는 AI가 변호사 업무를 보조하고 있다. 판사 업무는 어떨까. 법대 위의 판사가 누군가의 청탁을 받고 판결한다는 의심, 사건의 앞뒤가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을 먼저 고려한다는 정황이 나온다면, 그 판결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재판은 판사에 대한 신뢰가 거의 전부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차라리 알고리즘에 재판을 맡기자는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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