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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 짓도 없는데 벌써 한 해가 가버렸다. 이맘때면 늘 매체에서는 ‘20○○년의 인물’을 뽑곤 한다. 그래서 나도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인물을 찾아냈다. 이 코너를 통해 공개적으로 그를 나의 ‘2016년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그에게 알리고 감사의 마음을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아 세상을 떠난 백남기 농민의 큰딸 백도라지, 일명 ‘나물’님이다. 마침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피격되었을 때 나는 늦둥이 트위터 사용자가 되었고, 그의 계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고 이후 그의 삶을 1년간 목격하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모두에게 잔인했던 2016년, 나는 툭하면 혼자 중얼거렸다. ‘나물아 다 죽여.’

나는 서너 해 전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양육자’를 상해사건으로 잃었다. 그전에도 다복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내 주변은 한국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가득했고,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를 거의 윽박질렀다. 충격이 가시지 않아 떠밀리듯 형식적인 법적 절차와 장례 절차를 밟고 나서 한동안 영혼이 얼얼했다. 비정상이 된 혼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대책 없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마음이 즐거우려고 하거나,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좋은 일 같은 것을 했다간 죽은 이에게 하염없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잘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떠난 이가 더할 나위 없이 바랄 것임을 알면서도, 더 망가지는 것만이 나의 슬픔을 진정으로 증명하는 방법인 것만 같았다. 아니, 잘 지내면 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즐거워하면 절대로 안되는 것 같았다. 몇 년째 그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나물님’을 알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의 치료 첫 단계로 일상의 루틴, 그러니까 일어나서 밥 먹고 운동하고 직장 가고 퇴근하고 친구 만나고 하는 식의 사소한 과정을 지켜나가라고 말한다. 내가 가장 먼저 잃은 것도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물님의 놀라운 점도 그것이었다.

그는 결코 단 한순간도 인생을 놓지 않았다. 망가짐으로써 슬픔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고 순결한 피해자의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그는 누워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고 가정 내에서 매일 생기는 사소한 일상들을 해결했고 직장에 출근하고 돈을 벌었다. 휴일이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고 언론을 상대했으며 경찰을 상대로 법적 절차를 밟았다. 가끔 예쁜 것을 사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며 책을 읽고 운동도 부지런히 했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종 소수자들의 크고 작은 문제에 끊임없이 연대하고 발언했다. 그는 종종 썼다. ‘나물이는 다 죽입니다.’ 그런 다부진 모습에 어떤 이들은 진정 슬퍼하는 것이 맞냐며 비난을 종종 퍼부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백남기씨의 장남이었다면, 그의 태도는 독함이 아니라 강인함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 비극에 직면했을 때, 슬픔 속에 비참하게 매몰되지 않고 예쁜 조약돌을 줍듯 일상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싸우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는 우리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영웅이다.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한껏 비참하게 일그러져서 슬픔의 ‘진정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나는 머리채라도 풀어서 향유로 그의 발이라도 닦고 싶은 심정이지만, 나는 그가 나를 일으켜 향유를 다른 이들과 나눠 바를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일상이라는 것을 지켜 나가면서 싸우는 그의 하루하루 모습은 얼핏 소소한 듯 존엄했다. 오히려 그를 보는 사람들이 도리어 위로받는 일이 허다했다.

나의 영웅은 앞으로도 일상의 품위를 잃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싸워나갈 것이며, 나는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든 도울 것이다. 나물아 다 죽여. You go, girl.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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