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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푸른 양의 해라는데, 그런 양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지지의 열두 동물을 늘어놓고 보면, 푸른 용이나 푸른 뱀은 말할 것도 없고, 푸른 닭이나 푸른 원숭이도 상상이 가능하다. 천지가 개벽할 때 닭이 울었다면 푸른 닭이 제격일 것 같고 원숭이는 그 간교함이 푸른빛을 띠기도 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견우가 끄는 암소는 푸른빛이 짙어져서 검다고 말할 수 있고, 달나라의 옥토끼도 푸른빛이 은은할 터이다. 우리가 푸른 양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양이 우리의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신화를 들먹일 것도 없이, 아마도 한국전쟁 전까지는 우리의 삶에 양이란 동물이 없었다.

전쟁 후에 ‘백양’이라는 담배가 있었다. 양이 없던 나라의 담배에 그런 이름이 가능했던 것은 담배연기가 하얀 양털을 연상케 한 때문이기도 하겠고, 담배 피우는 한가한 시간에는 하얀 양떼가 풀을 뜯는 서구의 산록을 꿈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 이름에 담았을 수도 있겠다. 전통적으로 순결은 백색으로 표현되지만, 푸른색이 오히려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하다. 진해질 수도 옅어질 수도 없는 백색은 언제까지나 백색으로 남아 있지만, 푸른색은 옅어져서 투명함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청색은 비물질적 이미지를 누린다. 자연의 색깔 가운데 푸른색을 지닌 것은 하늘과 바다인데, 그것들이 또한 무한의 상징이자, 푸른색의 비물질성이 더욱 굳건하다. 양이 순결을 뜻한다면 이 비물질성의 푸른색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색깔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푸른 양을 변호해도 여전히 푸른 양은 농담처럼 들린다. 농담이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새로운 농담이기만 하다면. 세상의 거대한 변화는 농담으로 시작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예고했던, 디드로의 해학 넘치는 소설 <라모의 조카>나 보마르셰의 희극 <피가로의 결혼>이 그 증거다. 봉건시대에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이란 말보다 더 새로운 농담이 어디 있었겠는가.

김수영은 햇수로 따져 정확하게 반세기 전에 쓴 시 ‘절망’에서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지난봄에 304명의 아까운 사람들이 물에 빠져 숨졌을 때, 나라의 수뇌부는 온갖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사이에 얼굴을 바꿔 그들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해를 넘겨도 무정함은 무정함을 반성하지 않는다. ‘땅콩 회항’ 사태 이후 경영자 일가족은 여러 차례 사과를 하고도 여전히 복수심을 불태운다. 난폭함은 난폭함을 반성하지 않는다. 저 70m 높이의 굴뚝 위에 올라간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 김정욱씨과 이창근씨를 비롯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공에서 혹한을 견디고, 또 다른 사람들이 천막 속에서 단식을 하고 길거리에서 오체투지를 해도, 그들이 웃으며 땅에 내려오게 하고, 행복하게 밥을 먹게 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반성해야 할 세상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수영은 또한 그보다 훨씬 먼저 썼던 시 ‘꽃’에서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에서 “중단과 연속과 해학이 일치되듯이” 그 푸르고 길기만 한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고 말했다. 가망 없을 것 같은 것들이 그 가망 없음을 중단하고, 그러나 그 조건을 그대로 이어받아 마치 농담이라도 하듯이 기적 같은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겠다. 기적은 농담처럼 어렵고 농담처럼 쉽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이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70m 높이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바라건데 농담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출처 : 경향DB)


영국의 방랑 학자 패트릭 리 퍼머는 펠로폰네소스 남쪽 오지의 답사기 <그리스의 끝, 마니>에서, 그 척박한 산간지방 주민들의 인간미 넘치는 삶을 이야기하며, 그들이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새로운 농담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끊어진 황지에서 그 삶과 똑같이 오래된 농담을 반복하며 즐기던 사람들에게 다른 땅에서 먼 길을 걸어온 손님은 새로운 농담을 전해주는 사람이고, 그래서 천사와 다름없다. 새로운 농담이 삶의 새로운 변화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기약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운 한 마리 푸른 양은 ‘반성하는 곰팡이’나 ‘반성하는 절망’처럼 가당치도 않은 농담일지 모르지만, 상상력이 낡은 상상력을 뛰어넘지 않으면 농담도 변화도 없는 것이 확실하다. 찬바람 속에 솟아오르는 새해가 아무리 찬란하다 한들 저 어렵고도 쉬운 농담을, 그 반성의 변화를 불러오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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