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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라 글자와 말을 기리고 가꾸기 위해 기념일을 제정한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한글날을 만들어 그날 하루만이라도 나라의 언어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우선 한글이 오래오래 기림을 받아야 할 우수한 문자이기 때문이지만, 제 나라의 말과 글을 마음 놓고 쓰지 못했던 한 시기와 관련된 역사적 한에도 그 이유가 있을 듯하다. 한글날을 맞으면 사람들은 외래어의 범람이나 언어의 왜곡된 사용을 염려한다. 신문과 방송이 가끔 한글을 발전시킨 인물들에 관한 특집기사를 준비하기도 하더니, 요즘은 외국인들을 불러 한글을 예찬하게 하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관심은 그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국가나 민간에서 한국어의 발전을 위해 대대적인 사업을 기획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내 관심도 그런 선에 머물러 있기에, 바람직하고 실현가능한 사업을 제안하기는 어렵지만, 신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사전의 편찬이나, 이제는 만인의 필기구가 된 문서편집기의 정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나 같은 평범한 사용자가 엄두를 낼 만한 일은 아니어서,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지엽적이고 사소한 부탁이나 해보려 한다. 말 그대로 사소한 부탁이지만, 이들 지엽적인 부탁이 어떤 알레고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먼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관해서. 이 사전의 아이패드 앱 최근 버전은 ‘줄금’이란 낱말을 두 개의 표제어로 올리고 있다. 첫 번째 ‘줄금’에 관해서는 ‘금’과 같은 말이라고 했으니 ‘접거나 긋거나 한 자국’을 뜻하는 말이 된다. 두 번째 ‘줄금’에 관해서는 ‘줄기’와 같은 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용례가 문제다, “비가 한 줄금 쏟아지다”를 두 번째 ‘줄금’의 용례로 소개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도 아랫녘의 평야지대에서는 ‘비가 한 줄금 반 내렸다’나 ‘두 줄금이 못 되게 내렸다’는 말을 흔히 쓴다. 이때 ‘줄금’은 옛날 강우량을 측정하는 도구에서 그 단위를 나타내는 ‘금’을 말한다. 사라져가는 말, 또는 서울에서 쓰지 않는 말에 대해서는 그 용례를 채집하는 데 특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 부탁이다. ‘석작’이라는 용기가 있다. 가는 대오리를 엮어 만든 직육면체 상자형태에 뚜껑이 있는 바구니다. 위에서 내려다 본 모양이 직사각형일 때는 ‘긴석’이고 정사각형일 때는 ‘말석’이며, 가끔은 원통형도 있어서 ‘둥글석’이라고 한다. 이바지 음식을 담아갈 때 쓰는 고급 그릇이고 흔히 보는 그릇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 용기를 ‘석작’이라는 이름에 ‘한과 바구니’라는 말을 붙여 상품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동구리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자주 쓰는 그릇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다못해 사투리라는 꼬리표를 달아서라도 사전에 올려주기를 부탁한다.

한글과컴퓨터에 부탁한다. ‘한컴오피스 한/글’(2014년판)의 맞춤법검사기능은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갔다’고 쓰면 ‘감옥’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교도소’로 고치라는 것인데, 모든 감옥이 교도소는 아니다. ‘말은 하기 쉽다’고 쓰면 ‘하기’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다음’이나 ‘아래’로 고치라는 것이다. ‘키가 크다’라고 쓰면 ‘키’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열쇠’로 고치라는 것이다. 이 기능에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로마자로 표기하지만 영어가 아닌 글, 이를 테면 프랑스어로 된 글을 올리면 모든 낱말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잘못된 영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기능에는 사용자 설정 메뉴가 있어서 검사언어에서 영어를 제외하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설정이 저장되지 않으니 매번 다시 설정해야 한다. 맞춤법검사기능을 좀 더 섬세하게 다듬어 주기를 부탁한다.

한컴오피스의 아직 미흡한 맞춤법검사기능


한글과는 무관하지만 또 하나의 부탁이 있다. 로마자로 쓴 글에서 긴 낱말이 줄 끝에 걸리면 하이픈을 찍고 분철을 한다. 그래서 긴 단어에 ‘무른 하이픈’을 찍어두면 그 단어가 줄 끝에 걸릴 때 자동으로 분철이 되면서 하이픈이 찍힌다. 프랑스어에는 원래 하이픈이 들어 있는 낱말들이 많다. 그 하이픈이 있는 자리에서 분철을 하면 좋은데, 그 자리에 ‘무른 하이픈’을 찍어두면 분철하면서 두 개의 하이픈이 찍히게 된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에도 사전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신경을 써주기를 부탁한다.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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