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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 3월4일, 제19차 촛불집회의 구호였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10일, 헌재의 판결로 구호는 현실이 되었다. 11일, 제20차 촛불집회는 그야말로 봄맞이 축제였다. 날씨도 영락없는 봄날, 낮부터 광화문 광장은 기쁨과 설렘을 감추지 못한 사람들로 붐볐다. 블랙리스트,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파괴 없는 세상을 위한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6주기를 맞아, 탈핵을 정부에 요구하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나비행진’이 이어졌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흥겨운 한마당이었다. 그렇게 봄이 온 것 같았다.

같은 날,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 지난 1월 전주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 중 자살한 한 여고생의 추모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학생은 어른도 견디기 힘든 감정노동에 실적 부족과 장시간 근무로 시달렸다고 한다. “콜 수 못 채웠어.” 언제 오느냐고 묻는 아빠에게 보낸 문자였다. 2013년 너무 힘들고 배고파 못 살겠다며 자살한 삼성전자 서비스 수리기사,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이 떠올랐다. 안타깝지만 문제는 없다는 것이 LG유플러스 고객센터의 입장이다. 문제가 없어도 사람이 죽어 나가니, 영락없이 살인적인 노동 구조다. 위험과 고통의 외주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았다.

전격적인 사드 알박기 반입에 대한 성토와 규탄의 소리도 들려왔다. “여기도 사람 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 성주에 내걸린 현수막은 용산, 밀양, 청도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드 부지로 제공된 롯데골프장 안팎으로 경찰과 군 병력이 깔렸다. 길도 막았다. 원불교 성직자들은 철야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안보와 국익을 앞세운 국가폭력이 여전히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짓뭉개고 있다. 아예, 봄은 오지도 않은 것 같았다.

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집으로 돌아간 박근혜씨가 차에서 내렸다.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지지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도 했다. 자신이 공모한 국정농단 사태가 훤히 드러났는데도 오직 국익을 위해 살았다고 강변하다 파면된 대통령다웠다. 후안무치함에 소름이 돋았다.

“하필왈리(何必曰利).” 국익을 찾는 양나라 혜왕에게 맹자는 인의(仁義)를 찾으라 했다. 맹자는 ‘인’과 ‘의’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에서 나온다 했다. 아마 맹자는 혜왕이 말하는 국익이 실은 군주의 사익이라는 걸 꿰뚫어 본 것 같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세상의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국익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될 수 없다. 그런 국익은 유력한 소수의 배를 채우는 사익의 분칠일 뿐이다.

정의가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최대화할 때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가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익을 앞세운 강자들의 사익 추구는 해방 이후만 따져도 70년을 넘었다. 이 ‘적폐’를 뿌리째 드러내고 도려내야 ‘청산’이 된다.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은 재빨리 국익에 충성하고 사익을 취한다. 출중한 능력은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유지에 사용된다. 세상이 변할 리 없다.

정작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다(신영복, <담론>). 그리스도교의 표현으론, 십자가의 역설이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주말이면 휴식을 마다하고 거리로 나온 ‘어리석은’ 촛불시민들이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아니, 직접 보고 겪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자연이 사람과 공존하는 평화의 세계를 향해 함께 걸었다. 그런 세상이 마냥 꿈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여, 촛불의 마음을 놓지 않는 한,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조현철 서강대 교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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