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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제일 비싸다는 강남, 그것도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 바로 코앞 역세권에 비닐로 만든 둥지를 틀었다. 제대로 된 지지대 하나 없이 박스와 우산으로 천장을 겨우 받치고 있는 이곳은 비라도 조금 내리면 천장 구석구석에 물웅덩이가 고이고, 입구가 어디인지 찾기 힘든 기묘한 구조물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은 이곳을 ‘오성급 호텔’이라 부르며 500일이 넘도록 머물고 있다.

오성급 비닐 둥지 뒤로는 44층 높이의 마천루가 자리 잡고 있다. 롯데월드타워를 디자인하기도 한 미국의 유명한 건축설계업체 KPF가 설계한 삼성 서초사옥이다. 삼성전자 본사는 수원에 있지만, 삼성 서초사옥은 그동안 삼성그룹의 심장부 역할을 해왔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등으로 얼마 전 해체를 선언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을 비롯해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의 집무실이 이곳에 있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 화려한 조명, 웅장한 유리벽 외관을 보더라도 오성급 호텔이라는 설명은 아무래도 이쪽이 더 어울린다.

반올림의 둥지와 삼성의 서초사옥. 이들의 이야기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아빠에게는 아끼던 딸이 있었다. 대학 입학을 권유하는 아빠에게 빨리 취직해서 남동생 학비를 마련하겠다고 나선 듬직한 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회사인 삼성전자에 취직할 만큼 그는 아빠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던 딸이 삼성전자 입사 2년도 되기 전에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렸고, 병마와 싸우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2007년 3월6일. 딸 황유미의 나이는 고작 스물셋이었다.

딸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아빠는 그날 이후 딸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나섰다. 유미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백혈병, 비호지킨 림프종과 같은 희귀성 질환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진실을 알아주기를 기대했지만,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 경제를 먹여살린다는 판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독성 화학물질의 위험성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는 반올림을 만나게 되었다.

2014년 8월, 유미가 세상을 떠난 뒤 7년에 걸친 힘겨운 소송 끝에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의 죽음은 개인의 질병이 아닌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미 아빠 황상기씨는 아직도 정확하게 무엇 때문에 유미가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유미가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에서 다루었던 화학약품 성분이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삼성과 고용노동부가 끝까지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기업들은 한목소리로 반도체 제작 공정은 안전성이 100% 보장되는 무인 자동화 시설을 갖추어 노동자들의 건강에 어떠한 악영향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에 따르면 여전히 공정 과정에서 고약한 약품 냄새를 맡으며 일하고 있으며, 생리불순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을 앓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까지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 제보만 370여건에 달하고, 이 중 230여건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피해 사례다.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서 벌거벗은 채 길거리를 활보하는 임금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옷에 대한 입 발린 칭찬이 아니라,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부끄러운 진실이다. 화려한 이름에 가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어쩌면 외면해왔던 민낯을 지금이라도 솔직히 마주해야 한다.

오늘은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그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강남역 8번 출구 앞 오성급 호텔 앞에서 추모와 기억의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임금님의 길거리 행차를 향해 용감히 진실을 전하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서 새로운 봄날의 저녁을 함께 나누자.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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