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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기사는 사람을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모든 이의 영면이 뉴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고에는 ‘웬만큼’ 사는, 살았던 집안의 상사(喪事)만 실린다. 또한 그런 가족 중에서도 ‘정상’ 구성원만등장한다.
누군가 사망하면 배우자,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전·현직 직장과 직위가 병기된다. 하지만 부모가 사망해도 모든 자녀가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 배우자를 잃었어도 나설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이는 단지 혼외의 삶에 대한 부정을 넘어, 사실상(사실혼) 가족과 동성애자 부부 등 실제로는 가족이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제도적·문화적 배제다.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범에 부합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례식장에서 심심찮게 목도하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일례일 것이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 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삶이 불공평하듯 죽음 역시 그러하다. 애도의 위계는 말할 것도 없다. 애도를 서열화시키는 사회 제도와 문화적 인식은 매우 다양하다.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념할 것인가, 죽음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다.
슬픔의 위계에 대한 가장 가까운 논쟁은 9·11 사건일 것이다. 미국에 사는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 문제에 대해 용감하고도 신선한 사유 방식을 제기했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미국인에 대한 ‘전 세계적인’ 애도의 물결과 미국 국적이 아닌 사람의 죽음이 다루어지는 차이를 질문한다.
미·이스라엘 동맹에 의해 살해된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 미국 군수산업의 소비 대상으로 내몰린 지구촌 곳곳의 국지전 희생자들, 그리고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 혐오범죄의 주요 타깃인 성 판매 여성,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이민자…. 이들의 죽음은 지구촌 차원의 슬픔도 아니고 죽음과 그 사연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녀는 반미, 미국의 패권 혹은 생명 지상주의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질문한다. 소중한 죽음과 무시해도 되는 죽음. 애도할 만한 인간은 누구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족과 가족제도는 다르다. 가족의 소중함과 가족이기주의 역시 다르다. 또한 장례가 곧 애도는 아니다. 오늘날 장례 의례는 가족제도의 확장인 입신양명 문화와 관련이 깊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는 말처럼, 장례는 죽은 이를 애도하기보다는 산 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확인한다.
이것이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세상에는 좋은 이치도 많고 아름다운 원리도 많다. 다만 ‘갑’이 상주일 때와 ‘갑’ 자신이 사망했을 때, 우리의 대응이 다르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는 있다. 먹고사는 것이 어쩔 수 없다 해도 이해타산이 분명한 행동을 상제(喪祭)의 윤리, 인간의 도리, 전통으로 미화할 것까지는 없다.
일러스트 김상민
부고와 명절이 개인의 인생 성적표처럼 취급될 때, 즉 개인의 삶과 죽음이 가족의 지위로 대변될 때 가족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고 “나는 가족을 벗어나고 싶다”.
24절기가 중시되는 농업사회가 아닌 오늘날 명절은 점차 휴일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인식되어 부고의 정치는 명절에도 노골적으로 반복된다. 일단, 설 선물은 가세의 지표다.
진학, 취업, 결혼에 대한 인사와 훈수, ‘걱정해주는’ 친지가 고맙기만 할까. 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이번 명절 좋았다”는 사람 얼마나 될까. 체면과 시선의 사회. 우리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1인2역을 수행한다.
성공을 향한 질주. 명절은 이 시대 인생 목표의 경연장, 아니 ‘면접’ 심사장이다. 명절이고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듣기도 말하기도 민망한 이야기가 만발한다. 설 명절, ‘조용한 가족’이 많아질수록 성숙한 사회가 아닐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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