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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기분과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다르다. 우울증은 자살의 주요 원인이 되는 심각한 질환이지만, 우울증처럼 가볍게 취급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병도 드물다. 마음이라는 몸의 부위는 없다.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픈 병이다.
우울증은 기분, 인식, 판단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 아픈 병이다. 질병이 신체 내부의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우울증의 열쇠는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화학물질이 쥐고 있다. 그래서 세로토닌은 분자인데도 ‘행복 호르몬’으로 불린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이나 경쟁 사회의 압박으로 인한 자살이 사회적 타살로 인식되면서 유례없는 공감을 얻고 있다. 자살한 이를 비난하기보다 대책이 마련되고 낙인이 개선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 모녀의 동반 자살’이 아니라 먹고살 만한 개인이 ‘사소한’ 이유로 자살한 경우에도 이만큼 이해받을 수 있을까? 특히 예전의 가족 동반 자살은 생명경시론에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긴다는 비난이 엄청났다. 그런데 요즘은 혼자 자살하는 것보다 더 이해받는 듯하다. 최근 여론만 보면 자살 담론은 개인적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 이동했다.
나는 ‘사회적 타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공감’이 다소 염려스럽다. 개인과 구조, 자살과 타살을 지극히 배타적 범주로 놓고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을 구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로 구분한 것뿐이다.
자살 탐구는 원인과 결과, 몸과 마음, 자유와 강제, 개인과 구조 등 근대철학의 모든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다. 사회적 타살론은 위에 언급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대립쌍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지 않는 한, 현재의 자살 ‘담론 소동’은 일시적 유행이거나 삐딱하게 말하면 살아 ‘남을 수’ 있는 자들의 ‘안도’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한 동정 혹은 박근혜 정권의 실정의 사례로만 취급될 것이다.
‘세 모녀 자살’ 사건이 사회구조의 결과임은 명백하지만 그들의 ‘선택’, 정확히는 대처 방식이 반영되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개인적 사연처럼 보이는 자살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구별하기보다 구조에 대한 개인의 대응을 사회가 돕는 방식을 중심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고난이 정신적 면역력을 압도할 때 인간은 자살한다.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를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살은 질병사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의 원인은 같다.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에 대한 구별과 위계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생명보험 등 경제적 문제와도 직결된다. 전문의들은 우울증 환자를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기 어려운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힘든 세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 투쟁, 포기, 갈팡질팡 등 - 이 세로토닌 생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조와 개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우울증을 만들어낸다면 그 비율은 1 대 99, 51 대 49, 37 대 63 등 천차만별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구조가 몇 %이고, 개인의 특성·면역력·조건이 몇 %인지 계량할 수 없다. 몸(뇌)의 건강은 정치적, 생리적, 개인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이 모든 것들의 계속적인 운동과 복합성이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가 아닐까.
자살의 이유가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의 구분은 자살에 대한 몰이해의 첫 단추다. 자살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고통에 대한 몸의 면역력이지, 개인의 나약함이나 사회적 억압 자체가 아니다. 사회와 생물은 상호 작용(cultured nature)한다. 생물학은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적응과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아닌가. 지구상에 독자적 영역은 없다.
모든 인생사는 수용과 이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좋은 인간관계(사회 구조)에 따라 개인의 기운과 용기는 달라진다. 자연의 법칙은 “자살은 비정상이다” 혹은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의미한다. 이 의지는 건강 약자든 사회적 약자든 죽을 만큼 아픈 사람의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울증은 기분, 인식, 판단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 아픈 병이다. 질병이 신체 내부의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우울증의 열쇠는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화학물질이 쥐고 있다. 그래서 세로토닌은 분자인데도 ‘행복 호르몬’으로 불린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이나 경쟁 사회의 압박으로 인한 자살이 사회적 타살로 인식되면서 유례없는 공감을 얻고 있다. 자살한 이를 비난하기보다 대책이 마련되고 낙인이 개선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 모녀의 동반 자살’이 아니라 먹고살 만한 개인이 ‘사소한’ 이유로 자살한 경우에도 이만큼 이해받을 수 있을까? 특히 예전의 가족 동반 자살은 생명경시론에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긴다는 비난이 엄청났다. 그런데 요즘은 혼자 자살하는 것보다 더 이해받는 듯하다. 최근 여론만 보면 자살 담론은 개인적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 이동했다.
나는 ‘사회적 타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공감’이 다소 염려스럽다. 개인과 구조, 자살과 타살을 지극히 배타적 범주로 놓고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을 구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로 구분한 것뿐이다.
자살 탐구는 원인과 결과, 몸과 마음, 자유와 강제, 개인과 구조 등 근대철학의 모든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다. 사회적 타살론은 위에 언급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대립쌍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지 않는 한, 현재의 자살 ‘담론 소동’은 일시적 유행이거나 삐딱하게 말하면 살아 ‘남을 수’ 있는 자들의 ‘안도’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한 동정 혹은 박근혜 정권의 실정의 사례로만 취급될 것이다.
‘세 모녀 자살’ 사건이 사회구조의 결과임은 명백하지만 그들의 ‘선택’, 정확히는 대처 방식이 반영되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개인적 사연처럼 보이는 자살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구별하기보다 구조에 대한 개인의 대응을 사회가 돕는 방식을 중심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번만더생각해봐' (출처:경향DB)
인생의 고난이 정신적 면역력을 압도할 때 인간은 자살한다.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를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살은 질병사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의 원인은 같다.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에 대한 구별과 위계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생명보험 등 경제적 문제와도 직결된다. 전문의들은 우울증 환자를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기 어려운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힘든 세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 투쟁, 포기, 갈팡질팡 등 - 이 세로토닌 생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조와 개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우울증을 만들어낸다면 그 비율은 1 대 99, 51 대 49, 37 대 63 등 천차만별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구조가 몇 %이고, 개인의 특성·면역력·조건이 몇 %인지 계량할 수 없다. 몸(뇌)의 건강은 정치적, 생리적, 개인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이 모든 것들의 계속적인 운동과 복합성이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가 아닐까.
자살의 이유가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의 구분은 자살에 대한 몰이해의 첫 단추다. 자살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고통에 대한 몸의 면역력이지, 개인의 나약함이나 사회적 억압 자체가 아니다. 사회와 생물은 상호 작용(cultured nature)한다. 생물학은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적응과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아닌가. 지구상에 독자적 영역은 없다.
모든 인생사는 수용과 이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좋은 인간관계(사회 구조)에 따라 개인의 기운과 용기는 달라진다. 자연의 법칙은 “자살은 비정상이다” 혹은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의미한다. 이 의지는 건강 약자든 사회적 약자든 죽을 만큼 아픈 사람의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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