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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罷場) 분위기가 역력하다.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의 한적한 리조트로 집결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 실무자들은 각자 준비한 카드를 내보이고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 거래가 성사되기가 어렵다고 판단, 본국의 훈령에 따라 보따리를 싸고 기약도 없이 떠났다. 중재국 스웨덴이 다시 회동할 것을 제안했지만 회담 결렬 후 보여준 북한의 격렬한 반응으로 볼 때 성사되더라도 결과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년 내에 다시 회동할 가능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한때 ‘비바치시모’(매우 빠르고 활기차게)로 타오르던 비핵화 불꽃이 돌연 꺼지게 될 운명에 놓였다.

작년 6월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역사적 대좌를 할 때만 해도 비핵화 협상이 이렇게까지 곤두박질칠 것으로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화 협상이 ‘귀뚜라미 보일러처럼 잘 작동해서’ 새로운 북·미관계가 발아(發芽)되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으로 내심 기대하면서 합의문이 어떻게 도출될지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합의문은 서로 상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합의문이 그러했다. 특히 북한은 합의문 1조에 큰 기대를 했다. 베트남 하노이 회담(2019·2·27~28) 결렬 전까지 8개월의 템포는 ‘프레스토’(매우 빠르게) 이상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성사된 판문점 회동(2019·6·30)은 남·북·미 모두 4개월의 암중모색, 말하자면 ‘렌티시모’(매우 느리게)를 거치면서 생겨난 극적인 정치 이벤트였다. 의도했든 아니든 트럼프는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 지도자가 됐다. 북한도 판문점 회동을 “정전협정 이후 66년 만에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악수를 하는 놀라운 현실이 펼쳐졌다”며 회담 내용보다는 성사 배경과 회동의 정치·외교적 의미를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노이에서 트럼프에게 굴욕을 당한 김정은은 와신상담 후 ‘소스테누토’(소리를 충분히 끌면서 음을 그대로 지니고)를 고수, 판문점 회동 이후 스톡홀름 실무회담(10·5~6) 직전까지 총 아홉 차례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 역력했다. 외무성 제1부상 최선희가 그랬고, 비핵화 실무협상 대표 김명길 또한 그러했다.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 미국 주도의 제재를 비난한 김정은의 행보를 ‘위대한 사색’으로 칭송한 노동신문 보도와는 달리 김 위원장에게서 ‘그라베’(장중하게 느리게)의 템포를 찾기란 어려웠다.

김정은은 작년 5월 노동당 7차 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결산) 보고에서 “올해부터 2020년까지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병진노선을 틀어쥐고 에네르기(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민생활을 결정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어떡하든지 고난을 넘어서려는 김정은의 결기가 도드라졌다. 더군다나 내년은 5개년 전략이 끝나는 연도이자 노동당 창건 75주년이 되는 ‘꺾어지는 해’(整週年)다. 핵 억제력을 확보한 김정은은 이제는 인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성과를 보여주고, 젊은 지도자로서 선대(先代)와의 차별성을 최대한 부각시키려 애쓴다. 동시에 중국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하루바삐 정상국가로 도약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김정은의 절박함이 비핵화를 고리로 ‘막가파 트럼프’의 미국을 어떡하든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으리라 본다.

하지만 탄핵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는 트럼프는 북핵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마저 민주당 주도 탄핵 조사 목록에 올랐다. 터키와 쿠르드족 간 전쟁을 촉발한 트럼프의 시리아 미군 철수 오판으로 공화당조차 트럼프를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비핵화 동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트럼프의 비핵화 시계는 자연스레 ‘렌티시모’다. 활짝 열리는 듯했던 비핵화의 기회의 창이 빠르게 닫히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래저래 한반도 안과 밖의 풍경이 모두 어둡고, 어지럽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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