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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엔 특권이라는 단어가 1번 등장한다. ‘제11조 3항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사실 특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국회의원에 한해 두 가지 특권을 인정하는 조항이 있다. 직무상 발언에 대한 면책 특권과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되지 아니할 불체포 특권. 적어도 법적으로는 다른 특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권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국회의원의 특권 말고도 검찰과 언론 등이 가진 권력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것 외에도 곳곳에 스며 있는, 별것 아닌 듯하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특권도 있다. 사는 곳에 따라, 버는 돈의 액수에 따라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표현이 범람한다. 비정규직의 사원증 목줄·식권의 색이 정규직의 그것과 다른 곳이 있고, 노키즈존이 존재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급속도로 퍼지자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자는 목소리, 아시아에 대한 혐오가 고개를 든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김지혜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특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차별의 이면에 특권이 있는 이유다.

뭐 사소한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소한 듯 보이고 무의식적이며 심지어 쉽게 변명이 가능한 언행이 차별 구조를 공고화한다. <인종토크>의 작가 이제오마 올루오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름이 너무 어렵네요. 다른 별칭 없어요?” “아시아인치고 눈이 크네요” “만원이지만 비어 있는 옆자리” “엄마 아빠가 너랑은 놀지 말라고 했다는 말”. 사소하지만 계속 쌓여가며 편견을 강화하는 말과 행동이 바로 마이크로어그레션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만약 지금 ‘내가 차별을 하고 있다고?’ 혹은 ‘나에게 특권이 있다고?’라는 의문이 들었다면 일단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특권을 해체하고 직시할 때만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적 성취가 아닌 구조적으로 주어진 특권인 경우 이 분석은 더 유효하다. 올루오는 “우리가 가진 특권이 다른 이가 받는 차별과 교차하는 지점을 인식하면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난 1월 경향신문 기획 ‘가장 보통의 차별’은 우리가 특권과 차별이 교차하는 곳 어디쯤에 서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통해 성별, 성적지향, 학력, 거주지역, 외모, 나이, 경제력, 장애·병력 범주에서 각자의 차별과 특권의 경험을 돌아본 뒤 응답자들이 보인 반응도 이와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강자의 면과 약자의 면이 있다.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특권과 차별을 돌아보면 필연적으로 불편해진다. 남의 특권과 나에 대한 차별, 내 특권과 타인에 대한 차별이 맞닿은 지점에 있어서다. 그 불편함을 기어코 찾아내어 바라보는 게 차별과 특권을 없애는 시작이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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