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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비상대책위원회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새누리당은 5개월째 비대위 체제로 당을 운영해 왔고, 민주통합당도 어제 비대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통합진보당 역시 혁신비대위 구성을 예고했다.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걸까. 나는 사건사보다 국면사의 흐름을 주목하고 싶다. 최근 우리 정치의 상징적인 일은 지난해 9월의 ‘안철수 현상’이다. 안철수 현상에는 민주화 25년으로 가는 국면에서 우리 정치가 갖는 ‘대표성의 위기’가 반영돼 있다. 국민 다수의 의사를 대표하는 게 정치인데, 그 대표성이 발휘되지 않는 기성 정치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안철수’라는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에 담겨 표출된 게 안철수 현상의 본질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경향신문DB)
안철수 현상의 연장선에서 10월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됐다. 박 시장 당선의 원동력은 시민정치였다. 시민정치란 정당정치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게 아니라 새로운 인물·비전·정책, 무엇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정당을 혁신하려는 정치였다. 시민정치는 정당정치와 대립물이 아니다. 이름붙이자면 ‘시민적 정당정치’라 할 수 있는 이런 흐름은 민주화 25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가 열고 들어가야 할 정치의 문(門)이었다.
서울시장 보궐 선거 이후 시민들은 정치사회가 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정치사회는 문 저편으로 나간 게 아니라 문 이편에서 기득권, 짬짜미, 소통 부재를 고수해 시민들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선전한 이유 중 하나는 비대위를 출범시킴으로써 그나마 변화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정작 시민적 정당정치를 일궈야 했던 야권은 시민 다수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여권의 과반 확보를 허용해야 했다.
문제는 총선 이후다. 총선 결과는 선거에서 패배한 야권에 쇄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야권은 여전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지난주 단합이냐 담합이냐의 논란 끝에 박지원 원내대표를 선출했다. 지금 필요한 게 돌파력과 전투력의 리더십이라고 판단했겠지만, 계파를 넘어선 화합을 모색하고 시민적 공감을 일궈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더 심각하다. 비례대표 후보 경선 조작은 이념 문제를 넘어선 민주주의의 기본을 부정한 사건이다. 계파적 기득권을 둘러싼 논란 끝에 전국운영위원회는 현재의 대표단과 경선을 통해 선출된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자 14명을 총사퇴시키기로 했다. 정당의 생명인 정당성이 치명적으로 훼손된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국면사적 흐름에서 보면 이 우울한 풍경이 진보개혁 세력의 현주소다. 진보의 가치는 새로움과 변화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면 진보개혁 세력은 이미 낡은 것이 아닌가. 보수 세력과 비교해 정책들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당의 리더십과 운영방식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지 않은가. ‘괴물과 싸우는 이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바로 진보개혁 세력에게 주는 경구이지 않은가.
올해는 민주화 25년을 맞이한 해다. 민주화를 주도해온 것은 보수 세력이라기보다 진보개혁 세력이다. 진보개혁 세력이 지금 지쳐 있다. 진보개혁 세력을 지지해온 시민들은 크게 상심해 있다. 문재인,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김두관, 유시민 가운데 누가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안철수 교수를 영입해 후보로 내세우더라도 12월 대선에서 보수 세력과 제대로 경쟁할 수 있을지 더없이 우려스럽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길게 봐야 한다. 임시 처방으론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낡은 정치와 결별하고 시민적 정당정치로 나가야 한다. 소통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리더 발굴을 통해 세대교체를 이루고, 무엇보다 중산층과 노동계급을 삶의 위기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승부해야 한다. 전당대회든 중앙위원회든 기회는 남아 있다. 진보개혁 세력을 지지해온 시민들은 위로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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