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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총선 이후 이 시평에선 진보개혁 세력을 계속 다뤘다. 진보가 그만큼 위기에 처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정치가 진보만으로 이뤄질 순 없다. 이번에는 보수 세력을 주목하고자 한다.

총선에서 내가 새삼 느낀 것은 한국 보수의 힘이다. 새누리당이 이겼던 일차적 원인은 민주통합당의 실책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란 반사이익 이상의 것이다. 총선 국면에선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리더십이 돋보였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비대위를 마감하고 황우여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다. 일각에선 박 위원장의 독주에 우려를 표하지만, 12월 대선으로 가는 도정에서 박 위원장이 이니셔티브를 잡은 것은 분명하다.

돌아보면 우리사회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 세력은 진보개혁 세력에 상대적 우위를 점해 왔다. 보수가 패배한 것은 1997년 대선의 ‘이인제 변수’와 2004년 총선의 ‘탄핵 국면’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따른 결과였다. 진보개혁 세력이 보수 세력과 일대일로 대결해 승리한 것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경우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것도 박빙의 승리였다.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수의 정체성 위기를 논하다’ 토론회 ㅣ 출처:경향DB

우리 이념구도를 보면 보수 대 진보의 지지율은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보수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보수의 ‘진화’ 능력을 주목하고 싶다. 진화 능력이란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역량을 말한다.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은 적절한 사례다. 2007년 대선에서 보수 우위의 원동력은 노무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민주화에 맞서 ‘선진화’를 제시하고, 이에 기반해 보수적 헤게모니를 확장시킨 것 또한 주목해야 한다.

선진화 담론이 일종의 ‘창조’ 전략이었다면, 이번 총선에서 보수가 구사한 것은 ‘모방’ 전략이었다.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커지자 선진화 담론을 과감히 버리고 야권이 제시하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보수 세력 역시 들고 나와 진보개혁 세력과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섬세한 유권자들은 무상급식을 반대한 정당이 고교 무상교육을 주장해 당황했을지 몰라도 보수의 변신은 놀라울 뿐이었다. 권력의지에도, 담론 영역에도 담대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였다.

문제는 보수의 전략이 언제나 거기까지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정부보다 적절한 사례는 없다. ‘선진일류국가’, ‘창조적 실용주의’, ‘중도실용’ 등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담론들은 더없이 화려했지만, 집권을 마무리해 가야 할 현재 시점에서 정부의 성적표는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새누리당 지지율이 50%에 육박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엔 ‘박근혜’라는 분명한 대안의 존재가 중요하다. 보수 정치세력에 대한 보수적 시민들의 일관된 지지는 또 다른 요인이다. 보수 정당과 핵심 유권자들은 이익 공동체로서의 확고한 자기인식과 견고한 유대의식을 갖고 있다. 민주화 25년을 지나오면서 이런 자기인식과 유대의식의 경로의존성이 이미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보수의 힘에 담긴 빛과 그늘이다. 담론을 제시하고 시민들을 설득하는 정치적 기민성은 분명 보수의 장점이다. 그러나 보수 세력이 지지 그룹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보수의 딜레마다. 일단 선거에서 이겨야 할 절박감이 뻑적지근한 잔칫상을 차리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그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국민을 둘로 나눈 ‘두 국민(two nations)’의 대처 정부가 아니라, 둘로 나뉜 국민을 하나로 묶는 ‘한 국민(one nation)’의 디즈레일리 정부가 한국 보수가 가야 할 길이다.

누구는 내게 진보개혁 세력에 대한 걱정부터 하라고 말할지 모른다. 보수에 충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수가 혁신할수록 그것은 경쟁이라는 정치의 속성을 고려할 때 결국 진보를 강화시킨다.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간다는 리영희 선생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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