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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지요.” 시인 김수영이 쓴 ‘현대식 교량’의 한 구절이다. 다소 뜬금없이 이 구절을 말하는 것은 올 6월이 주는 의미 때문이다. 전공이 정치사회학인지라 1987년 6월에 대해 학생들과 더러 토론하게 되는데, 격의없이 6월항쟁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 시구를 자연 떠올리게 된다. 학생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1979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은사들로부터 1960년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19년이 지난 당시 열아홉 살의 나로서는 그 의미를 실감하기 어려웠다.



6.10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각 대학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 (경향신문DB)



오는 일요일은 6·10항쟁의 25주년이 된다. 25년 전의 이번 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 일주일이었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15년의 군사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향한 유토피아 에너지가 거침없이 분출하던 열정의 시간이었다. 민주화 시대를 연 6월항쟁은 25년이 흐른 현재 어떤 의미를 안겨주는 걸까. 민주화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프레임을 아우르는 ‘마스터 프레임(master frame)’이었다. 노동해방, 시장개혁, 복지강화, 양성평등, 환경보호, 인권증진, 그리고 평화공존 등의 프레임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구심력의 프레임이 다름 아닌 민주주의였다.


지난 25년의 민주화 과정은 명암이 분명한 시대였다. 6월항쟁의 가장 큰 성취는 ‘예외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전환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이뤄진 김영삼 정부의 군부 정치개입 차단, 김대중 정부의 수평적 정권 교체, 노무현 정부의 권력기관 민주화, 그리고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등은 그 성과들이었다. 금융실명제 도입,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호주제 철폐 등은 민주화가 가져다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하지만 빛 못지않게 그늘 또한 짙었던 게 민주화 시대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시작된 민주화 25년의 후반기는 신자유주의 시대였으며, 신자유주의는 사회양극화를 강화함으로써 분배구조가 악화되는 ‘민주화의 역설’을 가져왔다. 민주화가 성숙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제민주화가 요구됐음에도 재벌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중소기업의 경쟁력 약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대, 청년실업의 구조화, 더하여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기록, 물질만능주의·외모지상주의 등과 같은 시민문화 빈곤 등이 민주화 25년의 우울한 풍경을 이룬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25년이라는 한 순환의 문턱에서 관찰되는 기이한 현상들이다. 민간인 불법사찰, 권력의 방송 공공성 훼손, 그리고 비례대표 선출 부정 등은 우리 민주주의의 지반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증거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말의 독점, 권력의 독점, 자본의 독점에 맞서는 것에 있다. 보수든 진보든 지속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결국 말과 권력과 자본의 과두제적 철칙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어디로 갈 건가. 민주주의는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을 향해가는 부단한 과정이다. 동시에 활발한 소통 및 치열한 논쟁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를 지속가능한 현실로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민주화 시대가 지나가더라도 마스터 프레임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가장 소중한 가치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에 대한 성찰적 민주화’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대면해 있다고 봐야 한다.


‘현대식 교량’으로 돌아가면, 김수영은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고,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고 말한다. 6월항쟁 25주년의 중간 결산은 200일도 채 남아 있지 않은 12월 대선에서 이뤄질 것이다. 민주화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소중한 가치인 만큼 누구도 독점할 순 없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를 연 진보개혁 세력이 이렇게 뜻 깊은 해에 새로운 역사를 주도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적잖이 쓸쓸하다. 진보개혁 세력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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