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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책이 또 있네?” 책장 정리를 하다가 똑같은 책을 두 권 발견했다. 벌써 두 번째다. 온라인으로 책을 구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종종 있는 일이다.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5만원 이상 사면 더 얹어주는 적립금 때문에 대개 5만원 이상의 책을 한꺼번에 많이 사게 된다. 그렇다보니 사 놓은 책을 다 읽기 전에 다른 책을 더 구입하게 되고, 산 기억을 까맣게 잊고 같은 책을 산 후에도 모르고 지나간다. 가끔씩 이렇게 두 권씩 사서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책들이 발굴(?)될 때마다 괴롭긴 하다. ‘안 읽을 거면 사지 말자’ 다짐해봐도 그때뿐이다. 관심가는 책을 그때그때 다 읽지는 못해도 사 놓기라도 해야 안심이 되니 어쩔 수가 없다. 시험 기간에 한 무더기 책을 싸갖고 집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 펴보지도 않은 책 그대로 끙끙대며 들고 오던 학창 시절의 미련퉁이 짓을 반복할 밖에.

책장 정리를 하다보면 옛날 책을 들춰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 책에 연관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대학생 때 내게는 술만 먹었다 하면 후배들에게 책을 사주던 선배가 있었고, 신입 회원이 들어오면 시집을 선물해주는 전통을 가진 동아리도 있었다. 그 동아리의 선배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후배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한 권의 시집을 골라 앞장에 간단한 글을 적어 건네주곤 했다. 대개 좋은 시를 쓰라는 덕담이거나 좋아하는 시인에 대한 애정 표현의 내용이었다.

서울 신촌의 홍익문고 (출처 :경향DB)


책 사주는 선배와 동아리 선배들이 시집을 고르는 서점은 학교 앞에 딱 하나 있는 서점이었고, 그 서점은 늘 책을 반투명 비닐로 꼼꼼하게 싸주는 곳이었기에 그 서점에서 산 책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4년 동안 내 책장에는 반투명 비닐에 싸인 책들이 한 권, 두 권씩 늘어갔다.

그 책들이 늘어가면서 ‘책은 빌려 보면 된다’는 나의 신념 아닌 신념은 책을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주머니 사정이 뻔했던 그때는 딱 한 권의 책을 고르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당연히 그렇게 고른 책은 두고두고 읽기 마련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달리 그 비닐 커버 씌운 책들은 본문의 내용은 물론이고, 앞장에 뭐라고 써 있었는지까지 기억나곤 한다.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면 언젠가는 읽게 된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됐다.

서점의 상황은 좀 달랐다. 서점 한쪽의 벽면을 차지한 책꽂이가 토익 교재로 바뀌고 난 후 주인아저씨의 쓸쓸한 표정이 가끔 떠오른다. 그래도 나는 고심 끝에 내놓은 책을 그 두툼한 손마디의 손으로 꼼꼼히 포장해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순간이 꽤 즐거웠다.

가끔 포장이 영 서툰 아르바이트생이 있는 날이면 일부러 아저씨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 정도였으니까. 그건 온라인에서 5만원 이상을 채우기 위해 장바구니에 책을 넣었다 뺐다 하고, 쿠폰이 있나 없나 확인하고, 적립금을 사용하고, 항공 마일리지까지 적립하는 지금은 느끼기 어려운 즐거움이었다. 가끔 아저씨도 읽었다며 짧게 감상을 덧붙일 때에는 책을 제대로 골랐다는 뿌듯함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꽤 가벼웠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컸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그 서점이 없어진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아무도 내게 책을 선물하지 않는다. 나 역시 책을 선물한 기억이 까마득하다. 아니, 그보다 술 한잔하고 기분좋게 책을 고르러 가고 싶어도 갈 서점이 없다. 오래된 동네의 서점은 망하고, 새로 생긴 동네에는 서점이 생기지 않는다. 10년 새에 1258개의 동네 서점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고사 직전의 서점을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에는 반드시 서점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암덩어리 규제’라도 필요해 보인다. 아니면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있으니 대책이 필요하다”고 대통령이 한 말씀 하시는 건 어떨까? 대형 서점 프랜차이즈와 인터넷 서점만 남기 전에, 더 많은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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