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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빙수

opinionX 2019. 5. 2. 15:33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 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前程·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하다 이듬해 단행본으로 묶인 이광수 소설 <무정(無情)>의 한 장면이다. 초여름 더위가 성큼 다가온 경성의 6월, 주인공 형식의 하숙집을 찾아온 영채가 하루아침에 오빠와 아버지를 잃고 홀로 된 저간의 일을 털어놓다가 그만 복받쳐 쓰러진다. 형식과 영채는 어려서 함께 자란, 오누이 같은 사이다. 우는 영채는 숨이 넘어가는데 하숙집 주인 노파가 얼른 시장에 달려가 빙수를 사 온다. 위로랍시고 뱉은 말이라곤 ‘팔자’에 ‘전정 구만리’에 갈 데 없는 봉건적인 수사요, 듣는 쪽에게 위로가 될 리 없는 무정한 낡은 언어인데, 빙수 한 사발이 노파의 소박한 자매애를 간신히 구원했다. 빙수는 실제로 타는 속을 달래고, 몸과 마음의 열을 식히는 효과가 있었을 테지. 냉장고 보급률 높지 않던 시대, 한여름의 빙수나 얼음물이 보통 사람의 감각에 준 충격, 각성의 감도는 오늘날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리라.

19세기 이전에는 임금 또는 극소수의 권력자와 부자들만 한여름에도 얼음을 즐겼다. 한겨울에 자연빙을 채취해 빙고에 거두었다가, 한여름에 꺼내서 먹어치웠다. 파천황(破天荒)은 과학기술의 결과였다. 1862년 영국에서 비전기식 냉장고가 등장한다. 1875년에는 암모니아 압축식 냉동기가 나와 인공 제빙의 시대가 열린다. 1890년대가 되면 조선에서도 제빙기가 돌고 냉동고가 조영되었다. 여기서 나온 얼음으로 1910년대 조선의 도시에서 부자든 서민이든 한여름에 얼음 띄운 화채 또는 빙수 먹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대량생산 기술과 손을 잡고 보면 얼음이란 가장 비용이 덜 들고, 가장 관리가 간단한 식료품 아니겠는가.

“스윽- 스윽- 그 얼음 갈리는 소리를 들어라. 새하얀 얼음비가 눈발같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라.”

월간 잡지 ‘별건곤’ 1928년 7월호에 실린 빙수의 ‘문자먹방’이 이랬다. 10년 사이에 빙수를 향한 감각도, 빙수의 물성과 질감에 대한 감수성도 훌쩍 컸다. 먹방은 이렇게 다시 이어진다. 

“사알-사알 갈아서 참말로 눈결같이 간 고은 얼음을 사뿐 떠서 혓바닥 위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씹을 것도 없이 깨물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혀도 움직일 새 없이 스르르 녹아버리면서 달콤한 향긋한 찬 기운에 혀끝이 환해지고 입 속이 환해지고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가슴속 뱃속 등덜미까지 찬 기운이 돈다. 참말 빙수는 많이씩 떠먹기를 아껴하면서 혀끝에 놓고 녹이거나 빙수 물에 혀끝을 담그고 시원한 맛에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기뻐하는 유치원 아기들같이 어리광 쳐가며 먹어야 참맛을 아는 것이다.”

고대 중세 동아시아에서는 한여름에 빙고에서 꺼낸 얼음을 칼로 깎아 얼음가루를 내 금속 식기에 켜켜이 쌓고, 거기다 능금, 포도, 오미자, 양매, 오매, 치자를 꿀에 졸이고, 정향, 회향, 육두구, 계피, 후추 따위로 풍미를 끌어올린 즙을 친 빙수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는 한여름에 얼음만 봐도 좋았다. 달리 얼음의 질감을 논할 여지가 없으니 호화로운 즙액 얻기에 집중했다. 이윽고 한 번 수가 나자 사람의 감각이 이렇게 달라졌다. 위에서 본 그대로다. 도구와 방법이야말로 사람의 감각, 음식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법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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