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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지향 생활을 해보니 이 시대의 영상들을 새롭게 감각하게 된다. 비건은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맺는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무엇을 볼지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이 생긴다. 유튜브 시대를 나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실감하는데, 많은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본 영상에 대한 글을 써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나 먹방이나 게임 채널이나 ASMR을 소개하고 감상을 적는다. 그중에서도 나의 학생들이 가장 잦은 빈도로 시청하는 것은 동물 영상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영상들 속 동물들이 얼마나 귀엽고 웃기고 놀라운지를, 혹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슬픈지를 증언하는 글을 쓴다. 그걸 읽으며 나는 학생들의 여가 시간을 상상하고, 가끔 웃고, 또 가끔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반려견이 죽음을 맞는 순간을 촬영한 영상이 유튜브에는 아주 많다. 죽기 직전의 개와 그 개를 둘러싼 가족과 절절한 호명과 울음과 사랑의 메시지가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제목엔 날짜와 개 이름과 ‘무지개다리 건너는 순간’이라는 문장이 쓰인다. 나는 동물 영상을 잘 보지 않지만 아이들이 영상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옮겨 적어오는 날엔 그 죽음의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아이들은 그걸 보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쓴다. 나는 그들이 슬펐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영상 속 동물과 사람들이 겪은 슬픔의 무게나 진정성에 대해서도 감히 어떤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영상을 보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아이들이 느낀 슬픔의 정체를 생각한다. 나 역시 반려묘와 함께 살며 날마다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므로 그 존재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고통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장면이 웹에 업로드되어 누구든 언제든 시청할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데이터가 무한 복제되고 무한 반복 재생도 가능한 시대에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봄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의 결에 대해서도 세세한 구분이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영상에서의 슬픔은 시청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보고 싶은 슬픔’이자 ‘소진되기 좋은 슬픔’이다. 시청자의 일상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 소비된다.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그의 책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에서 스펙터클 사회가 미디어를 통해 제공하는 감정의 고양 상태에 관해 말한다. “텔레비전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웃음과 슬픔, 분노와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자극하지만 정작 이것이 겨냥하는 것은 감정의 소진상태이다.” 

우리는 예능이나 드라마나 영화나 유튜브 영상 클립 등을 통해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극적인 비극을 본 뒤에도 대체로 별탈없이 일상에 복귀한다. 숱한 미디어 콘텐츠가 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은 어제의 내가 변함없이 오늘의 나로 돼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정화 역할을 한다. 라캉은 이런 안정화를 비난했다. 안정화란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고착시키는 부정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걸 ‘살균된 슬픔’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한 슬픔과 분노는 우리의 존재를 뒤흔든다. 원래 자리한 위치에서 떨어져나가게 하고 방황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라캉은 말했다. “만일 슬픔이 우리의 ‘감정’에 진실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감동’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흔들림’을 통해서일 뿐”이라고. 

감동적인 동물 영상들이 범람하는 한편에는 공장식 축산과 공장식 수산 현장이 있다. 그라인더에 갈리는 병아리와 살처분당하는 돼지의 얼굴들도 있다. 그 현장 역시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슬픔의 실체는 거기에 죄다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조회수가 높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망각을 위한 카타르시스의 기능”이 거기엔 없다. 그 슬픔은 너무도 불편하여 우리를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비건이 아닌 이들에게도 분명히 어떤 영향을 미치고야마는 이미지들이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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