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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사람과 사연

opinionX 2018. 10. 25. 10:18

내가 처음 발을 디뎠던 시절에도 서울은 1000만이었다. 한마디로 어딜 가나 사람,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시에 살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도시인들이 보여준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물론 그보다 앞서 혼란스러웠던 사소한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학교 근처 식당의 물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이 3000~4000원쯤이었다. 거기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면 1000원을 더 내야 했는데 나는 이 셈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밥 한 톨이라도 흘렸다간 보릿고개부터 시작해 박통시절을 지나 신토불이에 이르기까지 지겹게 훈계를 들어야 했던 나로서는 찌개 값의 8할은 밥값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면 2000~3000원쯤을 더 지불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거다. 내가 보기에 밥 한 공기가 1000원이라는 건 정말 헐값이었고 그렇게 헐값에 먹어도 좋을 만큼 쌀밥 한 그릇이 대수롭지 않은 양식이라는 점을 납득하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는 그런 사실들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너무 흔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였다. 물론 이런 시구가 하나의 수사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선뜻 마음이 열리는 수사도 아니었다. 아무리 서울이 넓다 해도 1000만이라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어디에서나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그런 환경에서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 서울보다 지겨운 곳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단 한 명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렵고 외롭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일 테니까.

나는 그 지옥이 싫지 않았다. 사람이 그냥 무서울 때도 있고 관계 맺기와 소통의 어려움 탓에 무서울 때도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나를 늑대처럼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사람의 일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해도 기적처럼 소통이 이뤄지는 짧은 한순간이 없지 않을 테고 절망이 만연해도 희망이 전멸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 또 하나의 모래알로 섞여들고 싶었고 그들과 사연을 만들고 싶었다. 사연이란, 적어도 내게 사연이란 삶의 요체였다. 고향마을은 오래전부터 쇠락해가는 중이었고 내가 떠나올 무렵에는 이미 반쯤 부서진 곳이었다. 이내가 끼고 땅거미가 드리워지면 밤보다 먼저 침묵이 찾아왔고 기나긴 밤을 지키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땅을 떠나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었고 그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일도 드물었다. 하루하루가 100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되풀이되었다. 사람마저 어제의 그 사람이 내일의 그 사람일 거였다. 그러나 어느 이슥한 밤, 누군가의 방에 모여 소일거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면 그이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한 낯선 사람들이 되곤 했다. 그이들의 가슴 바닥에 쟁여졌던 사연들이 풀려나와 이야기의 그물이 만들어졌고 침침한 백열등으로는 결코 그러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그이들은 상심과 회한과 그리움만을 그물에 남겨둔 채 그물을 빠져나가는 물처럼 캄캄한 마당을 흘러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갔고 아마도 내가 알던 그 사람으로 되돌아와 잠자리에 누울 거였다.

사연을 지닌 존재들.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던 사람들. 사람이 떠난 자리를 기억하고 그 빈자리에 이야기를 채워 넣어 세계를 무한히 확장하며 살던 사람들. 그런 이유로 내게 서울은, 1000만이 북적이며 사는 서울은, 1000만의 사연이 어우러져 1000만배로 확장된 공간이며 가능성이었다. 사람이 흔할수록 사연은 깊어지고 내밀해진다. 사람이 흔할수록 사연이 확장시킬 영토는 무한에 가까워지며 이 작은 지구에 우주 전체를 이주시킬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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