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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눈앞에 다가온 이 즈음이면 여러 해 전 잠시 들렀던 크레타가 떠오른다. 그리스 여행을 마음먹었을 때 내가 염두에 두었던 곳은 아테네가 아닌 크레타였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거기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어서였다. 죽어 묻힌 이를 그리워하는 건 내가 오래된 책들에서 위안을 구하는 것과 비슷했지만 무엇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어서였다. 크레타는 포근했다.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납지 않았다. 옛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라클리온 구시가는 미로와 같은 골목을 품은 살아 있는 유적지였고 국가부도 사태로 어수선했던 아테네와는 달리 차분한 활기가 정갈하게 내려앉은 곳이었다. 계절 탓에 관광객이 드물었음에도 야외 테이블은 식사를 하며 맥주를 마시거나 물을 타면 우윳빛으로 변하는 우조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렌지 나무 우듬지에는 수백마리의 지빠귀가 깃들었고 해질 무렵이면 새떼가 허공에 그물을 치며 날아다녔다. 

오후 늦게 그곳에 도착한 나는 물어물어 예약한 호텔을 찾아갔고 이름은 호텔이지만 여관이나 다름없는 방에 짐을 풀고 산책을 나섰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에는 늘 비슷한 기분이 되곤 했는데, 이를테면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제주도 사람에게 “육지에서 왔수꽈?”라는 질문을 듣고 새삼 나는 육지 출신이구나 하고 깨달았듯이 낯설고 이질적인 그 공간이 내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리 없는 질문에 대답을 해보려 애썼지만 어떤 말도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이 곤혹을 실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와 쉬이 잠들 수 없는 방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그러안은 채 왜 이토록 먼 곳까지 와야만 했는지, 촌놈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뛰어넘은 게 아닌지, 그런 두려움을 곱씹으며 졸다 깨다를 반복했고 피곤이 덜 가신 채 아침을 맞았다.

첫 행선지는 카잔차키스의 무덤이었다. 나는 지도를 짚어가며 방향을 잡았지만 주택가를 지날 때는 길을 잃은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었다. 마침 슈퍼에서 장을 보고 나온 중년의 부인에게 길을 물었고 그이는 한참을 설명하다가 내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타라고 했다. 그이는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나는 답했다. 무얼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소설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다, 환영한다, 영광이다 등의 말을 했고 자신이 카잔차키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덧붙였다. 나는 아마 얼굴이 달아올랐을 테다. 그이는 계단만 오르면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닿는 성벽 아래 나를 내려주었고 깊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기대한 대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평평한 돌과 십자가 하나, 묘석 하나가 전부였고 묘석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 파문을 당해 살아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그. 주검이 되어 이 고즈넉한 성채 위에 몸을 누인 채 영원한 침묵에 들어간 그.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이라클리온 앞바다, 에게해를 보았다. 그리고 돌담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는 내 또래의 사내를 보았다. 관광객은 아닌 듯 그는 가벼운 차림이었고 우수에 잠긴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비슷한 걸 보았다. 우리 모두 말없이 누운 한 소설가를 등진 채 바다를 보는 중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한국어로 글을 쓰는데 내 자부심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를 슬프게 하는 게 무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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