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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노무현 탄핵심판 사건을 기각한다. 청와대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사건 대리인 이용훈 변호사를 대법원장에 임명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우리법연구회 멤버들을 법원행정처에 배치한다. 김종훈 비서실장, 이광범 사법정책실장, 이용구 송무심의관 등이다.
김종훈 실장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의 공동 변호인이었다. 이광범 실장은 광주일고 후배이며, 그의 형인 이상훈 판사는 이후 대법관에 제청된다. 이용구 심의관은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최종영 대법원장에 반발해 연판장을 돌렸다. 그 밖에 황진구 인사심의관 등도 우리법 회원이다.
우리법연구회는 누구나 알아보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했다. 진짜 핵심은 이들을 비롯한 행정처 인물 모두가 사법관료라는 점이다. 이용훈 대법원장 자신부터 행정처 차장을 거쳤다. 그는 기획조정실장에 박병대, 윤리감사관에 강일원, 등기호적국장에 임종헌을 각각 앉혔는데, 모두 판사 생활 대부분을 행정처에서 보냈다. 이들은 현재 대법관이고 헌법재판관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의 ‘판사 블랙리스트’ 관리처로 지목된 기획조정실 책임자 이민걸 기조실장도 ‘이용훈 대법원’에서 기획조정심의관, 사법등기국장을 거쳤고, 우리법 출신이다. 이렇듯 사법관료 집단은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내밀어 정권과 호흡을 맞춰왔다. 변하지 않은 것은 사법관료의 사법부 장악이란 사실이다.
지난겨울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양승태 대법원장이 회복불능 상태가 되자, 대법원과 행정처를 장악하려는 새로운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가 대법원장이 되고 누가 비서실장이라는 얘기도 돈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에게 선을 댔다는 얘기도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름도 있지만 결국에는 행정처 출신이란 설명이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대법원과 행정처를 장악한 이들은 진보이자 보수이고, 곧 노무현이자 박근혜였다. 보혁구도 같은 촌스럽고 게으른 프레임으로는 이들을 포착하지 못한다. 사법관료들은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들이고, 치밀하고 조직적인 집단이다. 이번에도 이미 양승태 카드를 포기하고 새로운 카드를 잡았다. 이것이 바로 행정처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사법 메커니즘이다.
무소불위 사법행정기구인 법원행정처는 일본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을 모방한 것으로, 식민지 사법에까지 연원이 닿는다. 사무총국이 법관독립을 침해하므로 해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본에서는 나오고 있다. 독일의 사법행정 교과서조차 “일본의 사무총국은 사법부의 형식적 독립을 명분으로 법관독립과 재판독립을 팔아넘겼다”고 지적한다. 나 역시 특별한 계기로 사무총국을 가까이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의 행정처는 사무총국보다 심각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와 가깝다는 인사가 만든 법원개혁안 초안을 최근 보았다. 40쪽 넘는 문건이지만 행정처 개혁 방안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누구라도 대법원장만 되면 친위조직인 행정처를 축소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냐”고 어느 부장판사는 말했다. 보고서를 의뢰한 국회의원실에 이런 의견이 있다고 말하자, 행정처 개혁을 포함한 최종본을 다시 작성 중이라고 전해줬다.
사법개혁에 대해 대통령 후보들은 조심스러워했다. 사법부의 독립이 걸린 문제라는 이유를 들었다. 유신 시절에 사법시험에 붙은 법조인들의 트라우마다. 지켜야 할 것은 부패한 사법행정기구가 아니라 법관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이다. 지금 대법원은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한 시민의 재판권 침해는 헌법 위반에 해당하며, 대통령에게는 헌법 수호 의무가 있다.
이제, 양승태 대법원장은 세련된 카드를 던지고 사라질 것이다. 관료사법을 위한 사법관료들의 성실한 저항이 시작되고 있다.
사회부 |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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