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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피해보상 중재안에 합의한 이후 추가로 피해를 제보한 사람은 227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중 141명은 삼성전자로부터 어떠한 피해보상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중재안이 정한 대상 질병·사업장 요건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대다수가 산재 신청도 어렵고, 설령 신청해도 보상 산정기간이 짧아 실익이 없다. 이 때문에 신청 포기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반올림은 14명에 대해서만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일하다 질병에 걸렸다면 사업주와 국가가 치료하고 보상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보상이 원천 봉쇄되고, 산재 신청조차 어렵다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3월 6일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던 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유미(당시 23세)씨의 12주기 추모 행사가 지난 2일 속초 설악산 울산바위가 마주 보이는 신선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12년 전 설악산 울산바위에 딸의 유골을 뿌려 딸을 이곳에 잠들게 했다. 반올림 제공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반올림의 싸움은 2007년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씨 등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 등으로 사망한 사건이 계기였다. 반올림은 지금까지 43명의 산재 인정과 대법원의 ‘삼성 직업병’ 확정 판결 등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11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수용하면서 11년간 이어온 양측의 다툼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중재안은 대상 질병을 백혈병 등 74종으로, 대상자도 ‘삼성전자 반도체 LCD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 및 사내협력업체 현직자와 퇴직자’로 한정했다. 협약 당시 반올림과 피해자 측은 “배제 없는 보상”을 요구했으나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삼성전자와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라”는 조정위의 압박으로 협약이 체결됐다고 한다.

조정위의 중재안은 삼성전자의 보상과 사과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중재안으로 인해 보상 대상 밖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삼성전자 전·현직 노동자나, 삼성전자 외 사업장 피해자의 보상길이 막혔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사업주도 일터에서 발생하는 질병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인과관계가 드러나고 사고를 막을 대책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노동당국도 노동자가 일터에서 얻은 직업병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얻은 질환을 직업병으로 인정할 때 ‘제2의 황유미’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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