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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을 조사한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가 지난 18일 내놓은 보고서는 사법부의 자정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일선 법관들과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사태를 축소·은폐하기 위한 꼼수로 진상조사위 카드를 사용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진상조사위는 고영한 법원행정처장과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이 개입한 정황을 확인했음에도 행정처가 조직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들 뒷조사를 한 파일이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컴퓨터를 조사하지 않은 채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단정지었다. 양 대법원장을 조사했다면서도 무슨 내용을 묻고 어떤 답변을 들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전·현직 고위 법관 7명으로 구성된 진상조사위는 논리적 비약과 모순, 궤변으로 가득 찬 보고서를 내놓고도 “어떠한 편견과 예단도 갖지 않고 철저하고 엄정한 조사를 했고, 조사대상자들이 적극적인 태도로 조사에 응해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대법원의 법관 탄압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18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ㅣ연합뉴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이다. 행정처를 통해 판사들의 학술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 들통난 것이 발단이다. 이 과정에서 행정처 소속 판사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해당 판사가 지시를 거부하고 사표를 내자 부임 2시간 만에 지방법원으로 인사 복귀 조치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법관 인사는 대법원장 전권이고, 특히 행정처로 발령난 판사를 되돌리는 인사를 대법원장이 모를 리 없는데도 양 대법원장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법관인 고영한 행정처장은 “해당 판사에게 연구회 활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거짓 해명까지 했다.

권력자의 부당한 지시와 증거인멸, 보복 인사, 블랙리스트 운용 등 박근혜 게이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판사 통제 목적으로 사법부에서도 재연됐다. 법관의 인권을 침해하고 재판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민주적·반헌법적 행위를 했다면 대법원장 탄핵 사안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사법부 내 헤게모니 다툼인 양 물타기하고, 일부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양 대법원장을 흔들기 위한 것이라는 식의 여론전을 펴고 있다. 거짓 해명과 사실 은폐로 사건을 키우는 사법부의 모습이 6개월 전 국정농단 사건 초기 청와대와 닮은꼴이다. 진상조사위의 부실 조사로 이번 사태를 사법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국회 국정조사 등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법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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