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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옷은 입는다. 벗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옷이 날개”라 했다. 입는 옷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는 뜻으로 풀어도 괜찮을 것이다. 옷 고르기는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선택이 탁월했다면 주변의 칭찬을 불러모은다. 그 칭찬은 때로 지루한 삶에 천상의 기쁨을 선물한다. 그래서 아침은 옷장 앞에서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옷장을 연다. 기막힌 선택을 기대하지만 무엇을 입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다. 옷 선택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 결국 유행 따라 남들 입는 대로 아니면 늘 입던 대로 입는다. 그래서 입고 있는 옷의 독특함과 색다름만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길거리에서 서로 마주치는 우리의 옷매무새는 다 ‘거기서 거기’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거리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평범한 말로 표현하면 멋쟁이, 유행하는 단어로는 ‘패셔니스타(fashionista)’라 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패션피플’, 줄여서 ‘패피’라 명명한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고 남들도 패피라 부르기를 기대한다. 패피는 그들의 자부심이 새겨져있는 약어이다.

패피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 기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이들과 마주친다면 강렬한 인상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들은 흔히 발견할 수도 없고, 쉽게 흉내낼 수도 없는 옷매무새로 무장했기에 결코 대중적인 인물은 아니다. 아마 대도시 거주자가 아니라면 이들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수 있다. 도시생활자라도 맨몸뚱아리를 가릴 수만 있다면 옷은 거기서 거기라고 간주하는 사람이면 이들을 코앞에서 목격하고도 그들이 패피임을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그 패피 중 한 명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에 대해 물었다.

누구나 길에 나서는 순간 남들의 옷차림을 스캔하고 스캔당한다. 거리는 서로 쉴 새 없이 스캔하는 ‘플레이 그라운드’이다. 그 플레이 그라운드의 ‘플레이어’ 패피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 주인공 바틀비를 닮았다.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I would not prefer to)”를 생활신조로 삼는다. 패피는 플레이 그라운드에서 “그렇게 입지 않는 편을 선택”할 다른 플레이어를 발견하고 현란한 개인기를 내세운 단독 드리블로 응수한다.

패피는 자신이 가진 돈에 의해 입을 옷 또한 결정되는 브랜드 사냥꾼처럼 “입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럭셔리 브랜드를 수집해야 직성이 풀리는 브랜드 사냥꾼은 자신만의 감각으로 완성된 리폼된 아이템 혹은 DIY 아이템으로 무장한 패피 앞에서 천박한 자본주의적 속물로 전락한다.

패피는 유행 따라 입었기에 결국은 다들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트렌드 물신주의자들처럼 “입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셀렙’이 없으면 어떤 옷도 선택하지 못하고 공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는 플레이어 앞에서 패피는 셀렙의 도움 없이도 ‘세컨드핸드숍’에서 발굴한 아이템으로 유행이 강요하는 속도를 스스로 통제하며 ‘리세셔니스타(recessionista·적은 예산으로 자신을 꾸미는 사람)’만의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한다.

패피는 아웃도어 웨어로 위아래 깔맞춤 풀장착한 필요취향의 신봉자인 플레이어와 달리 “옷을 기능으로만 입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기능에 의해 개성이 완전히 잠식당해 아웃도어 웨어를 입은 사람으로만 기억되는 사람, 북한의 집체극 <아리랑>의 플레이어인 듯 동일한 옷으로 무리를 이룬 사람들 앞에서 패피는 기꺼이 도시의 고독을 선택한다.

패피는 위험한 외줄타기를 한다. 시장경제가 유지되는 한 패피와 패피가 비난하는 브랜드 사냥꾼, 트렌드 물신주의자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모두가 습관적 선택, 남이 대신 해준 선택, 브랜드의 선택, 심지어 선택을 포기한 선택이라는 안전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플레이어로 구성된 이 사회에서 패피는 ‘사모님룩’ ‘사장님룩’ ‘청담동 며느리룩’도 피해가며, ‘홍대충’도 ‘귀족룩’도 피해가야 한다. 패피의 여정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모두 통과해야 하는 오디세우스만큼이나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돈이 멋을 보장하지 않고 돈 없어도 멋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용감한 사람들에게 배정된 인물 조각보의 한몫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댄디’와 ‘보헤미안’이 없었다면 19세기의 세계수도 파리가 불가능했듯이, 고작해야 셀렙을 모방하기에 급급한 트렌드 추종자, 돈값이 취향이라고 믿는 브랜드 사냥꾼, 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필요취향 선수들로 가득한 이 도시에서 패피가 외줄타기에 실패하지 않고 증식한다면 그것은 어떤 징후일 수 있다. 외줄타기에 성공하여 자신이 얼빠진 멋쟁이도, 따라쟁이 속물도 아님을 입증한다면, 그들은 습관에서 벗어난 삶이 가능함을 옷차림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자고로 미래는 그런 것 아니겠는가?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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