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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진화된 사이보그 군단이 인간이 사는 행성을 통째로 파괴해버린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새로운 행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SF 스토리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 속의 재난이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행성이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었으니 나라가 망한 정도가 아니라 말하자면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있고, 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필요하다. 그 삶을 이끌어줄 지도자도 필요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추적해오는 사이보그와 싸울 군대도 필요하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맡게 된 사람은 사이보그의 공격이 있을 당시 운 좋게도 행성을 떠나있던 교육부 장관이다. 정상적인 시기였다면 권력 서열에 제대로 끼어있지도 못할 사람이었으나, 행성이 파괴되면서 권력자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드라마는 이렇게 멸망과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자문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말이다. 더는 존재할 필요가 없어서였겠죠. 사이보그가 했던 대답으로 기억한다. 그 말의 뜻을 더듬어보면, 더는 존재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사회, 혹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었던 것 같다. 매우 성서적이다.

수없이 많은 재난과 심판을 거치고도, 그러나 인간은 살아남는다. 역으로 말하면, 존재할 필요가 있어서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을 극복하는 성장이 그려지고, 당연히 사랑과 배반, 그런 것들이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은 사이보그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장성과, 어쩌다가 대통령이 되어버린 전직 교육부 장관이다. 둘은 갈등하고, 화해하고, 같이 성장한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을 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결단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켜야 할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선의이기도 하다.

대선 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 이 드라마가 떠오른 것은 이 드라마에서 보여졌던 지도자들의 모습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마침내 다시 찾게 될 새로운 행성에서의 모습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게 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일 터인데, 권력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겸손해질 수 있을까. 드라마에서는 그 어려운 숙제를 신에게 맡겨버리는 듯하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터. 그렇다면, 이제 곧 우리의 대통령이 될 누군가는 우리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질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에게는 준비된 국민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겨울은 역사에 기록될 재난이기도 하지만, 그 재난을 극복한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은 툭하면 무너지지만, 준비된 국민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사이보그’로 상징된 수난과, 모순과, 부패, 오죽하면 행성이 날아갈 정도로 쌓여있었을 ‘적폐’에 맞설 준비를 한 국민들이다. 아마도, 우리는, 나라를 구할 것이다.

국민이라는 말을 하다보니, 몇 주 전에 방송된 <무한도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원미팅제를 제안한 한 시청자는 정치인들이 자꾸 ‘국민의 뜻’이라고 말을 하는데 자신은 그들에게 한번도 자신의 뜻을 말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쓰는 ‘국민’이라는 단어, 무섭다. 그들이 국민을 무서워해야 하는데, 그 단어만 무서워졌다. 정작 그 시청자의 말마따나, 나도 정치 하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 뜻은 분명히 있는데 내 뜻이 어떤 정치인이 쓰는 ‘국민의 뜻’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잘 알 수가 없다. 홀로 상상을 해봤다. 국회의원미팅제, 혹은 대통령미팅제가 실현되어 내가 그들 중의 누군가를 만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뜻을 말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기회가 매일매일 오는 건 아닐 테니 심사숙고, 내게 가장 중요한 말을 해야 할 터이다. 세계평화를 원하고, 지구의 기후도 정말 걱정되고, 살기 좋은 내 나라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도 하지만, 그런 기회가 정작 온다면, 구체적으로 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내 이야기가 내 옆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수천가지다. 글을 쓰는 사람이니, 책 읽는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말해야 할 것 같고, 그러겠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거냐고 묻고 싶고, 혼인적령기 딸아이가 있으니 이 땅의 청춘들이 맘 편히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해야 할 것 같고, 내가 곧 노령화 사회의 당사자가 될 터이니 노인복지를 위한 확실한 대책을 세워달라고도 해야 할 것 같다. 또 살면서 괴로웠던 일들을 떠올리자니, 이 땅의 교육정책 좀 어떻게 해보라고 촉구하고 싶고, 내집 마련은 고사하고라도 당장 전셋값 걱정 좀 덜 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고, 제발 닭 좀 그만 죽이고 오리도 좀 그만 죽이게 해달라고도 하고 싶다. 그러겠다고 하면 다시 한번, 어떻게 그렇게 할 거냐고 물어야겠다. 각서도 쓰라고 하고, 안 지키면, 혹은 못 지키면 어떻게 할 건지도 물어야겠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은 내가 정말로 무서운 쪽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사를 가게 되어서 겨울과 봄 사이 집을 보러 다녔다. 햇살 좋은 날과 꽃 핀 날과 비 오고 우중충한 날의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햇살 좋은 날은 좁고 누추한 집에서도 어찌어찌 재미나게 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비 오고 우중충한 날에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속만 상했다. 장미가 활짝 피는 시기에 나라의 집을 새로 짓는다. 후보들은 모두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저 어려운 일을 스스로 맡아 기꺼이 고생하겠다고 하니, 실은 그 후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믿음이 가는 공약과 그걸 정말로 실현할 거라고 믿어지는 후보자가 누구인지, 잘 살펴봐야 할 일이다. 후보자들이 바쁜 만큼이나, 우리도 바쁘게 살펴봐야 할 일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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