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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일 등 서유럽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사망할 경우 ‘기업에 의한 살인’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인체에 치명적으로 유해한 작업환경에서 오랫동안 일하도록 방치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다는 뜻일 터이다. 또한 이 표현에는 직업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은 반드시 막을 것이며, 해당 기업에는 강력한 법적 제도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삼성전자 액정화면(LCD) 천안공장에서 일하던 중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려 13년 동안 투병해온 윤슬기씨가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가 악성 뇌종양에 걸려 투병하던 이윤정씨가 사망한 것이 불과 4주 전인데 또다시 윤씨의 부음을 접하게 되니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윤씨의 사망으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및 LCD 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 재생불량성빈혈, 백혈병 등 업무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모두 56명에 이르게 됐다. 어떻게 해서 단일 업체에서, 그것도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학계와 법조·의료·노동계 인사들이 삼성 직업병 피해 인정 촉구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2010년도. (경향신문DB)



삼성은 이제 56명의 인명이 희생된 이 중대한 사안 앞에서 직업병에 대한 인식과 발상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삼성은 그동안 직업병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다가 사망자 속출로 비판이 거세지자 2년 전에는 ‘인바이런’이라는 해외 업체를 통해 ‘반도체 공장 노출평가’라는 연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결론은 “모든 위험요소는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안전한 곳이라면 어떻게 20대 초반의 젊고 건강한 여성들이 가족력과는 상관없는 질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삼성은 자신의 입맞에 맞는 업체를 동원해 도출한 결과만을 되뇔 것이 아니라 관련 정부부처와 시민단체 전문가들까지 함께 참여하는 공동 역학조사가 실시되도록 적극 협조해야 한다. 산업재해 승인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행정소송을 낼 경우 재판에 개입해 방해하거나 유족들을 회유·협박하는 등의 행태와도 결별해야 한다. 


무엇보다 삼성은 직업병에 의한 사망은 ‘기업의 살인행위’라는 뼈아픈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는 정부에도 요구되는 대목이다. 따지고 보면 ‘기업에 의한 살인’이 근절되지 않고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정부가 이러한 범죄를 치죄(治罪)하지 않고 묵인·방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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