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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에렉투스가 불을 이용한 142만년 전부터 인간과 동고동락한 말이 있다. 쉽게 불이 붙도록 먼저 태우는 ‘불쏘시개’다. 돌을 튕기고 나뭇가지를 문질러 불붙이던 선사시대엔 낙엽·풀·잔가지·털·관솔이, 문명시대엔 종이·지푸라기·영지버섯이, 지금은 번개탄·기름도 그 역할을 한다. 동해안 산불에서 300m를 날아다닌 솔방울도, 노트르담성당 불길을 키운 지붕 밑 800년 된 참나무도 사람들은 불쏘시개라고 했다. 인터넷에 불쏘시개를 치면 기사 44만건이 뜬다. 도화선·촉매·신호탄·마중물과 비슷한 말인데, 불로 비유하는 인간사가 유독 많고 널리 알려진 순우리말의 멋스러움도 더해졌을 터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14일 오후 사퇴 의사를 밝힌 후 정부과천청사를 나서고 있다. 이날 조 장관은 특수부 축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검찰개혁안을 발표한 뒤 약 3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불쏘시개는 정치적으로 변화의 촉발점에 쓰인다. YH사건→김영삼 의원직 박탈→부마항쟁→10·26으로 이어진 유신 말기 사건은 연쇄적으로, 1990년 지방자치제를 연 김대중 전 대통령 단식에도 이 제목이 뽑혔다.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2000년의 동교동 권노갑, 2012년의 친박 허태열, 올해 이해찬·양정철은 물갈이의 십자가를 자임했다. 4차례나 험지에서 지역 벽에 도전한 ‘바보 노무현’도 불쏘시개로 불렸다. 꼭 의도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03년 9월4일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일어난 ‘이미경 의원 머리채’ 사건은 그날만 의원 31명이 탈당계를 낸 분당의 불쏘시개가 됐다. 두번 구속된 안희정은 2002년엔 정치자금 투명화, 올핸 미투(MeToo)의 불길을 댕겼다. 트럼프·김정은이 주고받은 친서가 비핵화 협상을 촉발시킬 때도, 담뱃세·금리·온실가스·동남권신공항이 세상 이슈가 될 때도 곧잘 따라붙는 말이 불쏘시개다.
조국 법무장관이 14일 “검찰개혁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물러났다. 66일간 대한민국 뉴스 중심에 섰던 사람의 사퇴 변에 불쏘시개가 소환된 것이다. 조 장관은 지난 1일 출석한 국회에서도 “제게 주어진 시간까지 제 일을 하고자 한다. 불쏘시개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했었다. 그 분기점을 정부 몫 검찰개혁안이 발표된 날로 잡은 셈이다. 불쏘시개는 야당이 대통령에게 요구한 ‘읍참마속’과 동전의 앞뒷면이다. 겸손한 표현이지만, 더 큰 태풍을 예고하는 말일 수도 있다. 조국이 불쏘시개가 된 촛불은 검찰개혁과 공정사회였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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