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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4일 지면게재기사-

“지난 2년 동안 국정을 이끌어 온 문재인 정부를 100점 만점으로 평가하신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조사회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당신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을 할 것이다. 90점이든 40점이든. 이어서 “그 점수를 주신 기준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합당한 기준인가? 남들도 그 기준에 동의할 수 있을까? 혹시 20년 전에나 통용되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더힐티브이(The Hill TV)의 크리스털 볼과 인터뷰를 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앤드루 양은 매우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일부 발췌인용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지향하는 경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GDP는 우리를 벼랑 끝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GDP는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자살, 약물 남용, 스트레스, 가정경제의 불안정도 기록적입니다. 측정도구가 잘못된 겁니다. 우리의 행복과 건강, 약물로부터의 해방, 깨끗한 공기와 수질, 우리 아이들의 행복 등에 최적화된 지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분석국에 가서 말할 겁니다. 이봐요, GDP는 거의 100년이 되었어요. 낡고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고요. 업그레이드를 합시다. 시대에 맞는 ‘미국 채점표(scorecard)’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건강과 수명, 정신 건강 등이 반영된 지표 말입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여전히 100년 전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혹은 남들의) 성적을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공을 측정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발전의 기준도, 승리의 판정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대학교수의 평가방식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연구를 많이 해서 논문만 많이 쓰면 ‘점수’가 올라갔는데, 이젠 그 논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활용하는지에 따라 ‘점수’가 바뀐다. 야구선수의 성과를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따졌던 투수의 승수나 타자의 타율도 이제는 평균자책점이나 진루/장타율에 그 자리를 내줬다. 확고해 보이던 기준도 시대가 바뀌면 성긴 구석이 발견되고, 환경이 바뀌면 정당성도 떨어진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를 세면서 내가 이겼네 네가 이겼네 하는 다툼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각각 여의도 광장에서 유세를 벌이며 서로 100만명을 넘겼다고 우겼다. 소위 군중 숫자로 ‘세 싸움’을 하던 시절이다. 불과 5년 후 선거에서는 후보들이 대규모 유세를 안 하기로 합의하면서 소위 ‘100만 유세’는 사라졌다. 27년 전이다.

이 쓸데없는 싸움을 부추기는 언론의 보도기준은 무엇인가? 인근 지하철역 하차 승객이나 휴대전화 접속 기록을 따지며 부득부득 승패를 결정짓겠다는 언론사들은 이 시대 언론의 사명이 방문자 수 증가와 수익의 극대화라 생각하나? 양극화시켜놓고 양극화가 문제라며 한탄하면 회사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가? 남들 페이스북 내용 쫓아다니며 특종, 단독 타이틀 붙여 클릭 장사하는 기자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 언론사의 성공 기준은 무엇인가?

앤드루 양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그는 측정도구가 과연 타당한지 묻는다. 정확하고 엄밀하게 측정하면 ‘신뢰도’는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애초에 측정하고자 했던 그 무엇”을 측정했다는 보장은 없다. 최첨단 디지털 저울로도 키를 잴 수는 없듯이. GDP는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손들의 건강을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수치이다. 지금 우리는 이 정부의 성공을, 혹은 여야 대결의 승자를 무슨 기준으로 따지고 있는 것인가? 일단 군중의 숫자는 아닌 것 같다. 뜬소문 하나로 들쭉날쭉하는 지지율도 타당한 잣대는 아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국정 운영의 점수를 매기는 우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언론의 보도행태를 욕하거나 상찬할 때의 기준은 무엇인가? ‘조국 수호’도 ‘조국 파면’도 이 시대 이 사회의 안녕함을 판정할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검찰개혁도, 대통령 탄핵도 결국 더 큰 목표를 위한 수단이고, 언론의 ‘팩트 체크’도 공정한 보도와 건전한 비판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양비론이 아니다. 양비론을 넘어서자는 얘기다.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중요할지에 대한 논의를 좀 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 자리에 나와 또 표창장 얘기나 한다면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고, 옳다구나 싶어서 삿대질 사진을 특종으로 싣는 언론이 있다면 우리나라 기자들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아직 기대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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