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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머리나 가슴만이 아니라 배와 손발까지 중력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지표면을 향해 끝없이 내려앉는 기분, 슬픔과 고통이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며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다는 무기력 때문에 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진다. 이들에게 절망은 슬픔과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증언할 말이 없는 데서 찾아온다. 


말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는 고통은 나눌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말은 한없이 미끄러진다. 네가 나와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너와 내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라고 해서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고통의 증언 불가능성, 소통 불가능성, 상상 불가능성은 언어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 사건, 마음을 표시하고 표현하며 소통하기 위해 건넨 말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일치할 수는 없다. 말 없이는 소통도 불가하지만 그렇다고 사물, 사건, 마음이 말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대상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말의 한계는 곧 말의 힘이기도 하다. 이름도 없는 사물, 발언권을 빼앗긴 사람, 언어를 상실한 사건조차 말 없이는 배제와 감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다. 그러니 말의 한계를 힘으로 뒤집는 전복의 글쓰기가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기자, 소설가, 언어학자로서 고종석이 쓴 글은 수많은 사람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글을 죄다 읽어볼 염사가 없는 나조차 <감염된 언어>와 <서얼단상>을 읽으며 편협했던 생각을 고쳤다. 불순보다 순수가 더 폭력적이라며 ‘순화’를 ‘죽임’과 등치시킨 언어사 이야기, 소수자란 관련된 사람의 수(양)가 아니라 배제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그의 감수성 이야기는 세상을 바꿀 사유의 전환을 요구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각하는 대로 살려는 사람도 많으니 그의 글이 바꾼 사람만큼이나 세상도 바로잡은 것이다. 


칼럼니스트 고종석 (출처: 경향DB)


그래도 고종석은 양이 차지 않았나보다. 그의 글을 읽어준 사람의 수가 너무 적단다. 인문·사회 학술도서가 500부 미만으로 거래되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5000~6000부를 팔아온 그의 불만은 불안에 가깝다. 어쨌거나 판매량 때문은 아니고,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판단이 절필의 참 이유란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이 내린 바 있는 이 판단에는 독자의 수와 글의 힘을 비례관계로 치부하는 통속적 믿음이 숨어있다. 중·하위직 관료나 정치 보좌관이 백낙청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자조에서 그 까닭이 드러난다. 고종석은 ‘바꿀 수 있는 힘’에만 몰입한 나머지 어느덧 ‘어떻게’를 잊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 특히 지는 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변절해 왔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하다 자기 말의 메아리가 작아지면 반대편에 가서라도 목소리를 키우고 싶어서다. 


고종석은 변절할 사람이 아니다. 안철수와 문재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더라도 박근혜와 싸우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온몸으로 글을 써온 자신을 배반했다. 말의 한계에 직면한 글쟁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깥을 향한 충동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글쓰기의 바깥이 정치판은 아니다. 위대한 시인 김수영이 ‘피로’를 감내하며 <달밤>에도 불온시를 쓴 사연이다. 


언어(텍스트)의 바깥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지구적 논쟁 결과와 무관하게 글쓰기를 멈춘 정치판은 흥정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흥정에 실패하며 침울하고 역겨운 회귀만이 범람한다. 글쓰기의 바깥이 또 다른 글쓰기여야만 하는 까닭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바깥은 하나의 장소지만 비어있는 장소, 곧 안과 안 사이의 ‘공(空)=간(間)’이다. 그러니 고종석이 안철수의 옆자리에서 피로를 느끼고 빈 공간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곳엔 언어를 빼앗긴 채 신음하는 사람과 사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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