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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단풍이 형형색색으로 가야산을 수놓고 있다. 가야산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다 못해 시린 느낌마저 더해 간다. 가야산에 우뚝 솟은 기암들이 눈앞에 덮칠 듯이 다가온다. 매년 이맘때면 으레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시릴 만큼 맑고 투명해진 시냇물은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따라 흐른다. 홍류동은 가을 단풍이 투명한 계곡물에 비쳐서 붉은빛 흐름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야산 속 해인사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국화꽃 향기 그윽한 도량에, 가족들끼리 혹은 연인들끼리 수많은 관광객이 산사를 찾아온다. 이렇게 세상은 끝이 없을 것 같던 긴 터널에서 막 벗어난 느낌이다.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익숙하지만 새로운 일상에서 저마다 더 깊은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엊그제는 오후에 모처럼 시간을 내서 마애불에 다녀왔다. 익숙한 걸음으로 대략 40분 남짓 걸리는 산길이다. 산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제법 찬 기운을 머금은 골바람에 떠밀린 낙엽들이 힘겨운 발걸음을 잡아챈다. 더불어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 소리도 그윽함을 더한다. 사각사각 낙엽들을 조심스레 헤치듯 밟아 나간다. 걷는 도중에 다람쥐뿐만 아니라 꿩, 고라니 할 것 없이 다양한 생명들과 마주친다. 내 발소리에 그들이 놀라고, 그들이 재빨리 숨는 소리에 나 또한 놀라게 된다. 이들에게는 제아무리 산승이라 해도 이방인일 뿐이다. 마애불에 도착하기 직전, 마지막 가파른 산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훠이훠이 올라가다 보면 이내 마애불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흥망성쇠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애불 앞에 홀로 서 있자니 불현듯 지난겨울에 만난 인연이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홀로 마애불로 향했고, 그곳에서 생경한 모습을 목격했다. 인적이 끊긴 산중에, 날씨도 춥고 바람도 매서운데 웬 중년의 서양 남자가 마애불을 바라보며 합장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기도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도 간절한 모습에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무슨 사연으로 이 추운 겨울, 이 늦은 오후, 눈발이 희끗거릴 정도로 궂은 날씨에 간절히 무언가를 기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사연을 듣고 보니, 국내 대학에 교수로 와 있는데, 불과 얼마 전에 어린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이곳저곳 다니다가 절에 와서 지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거사는 아들 생각을 좀처럼 떨치고 일어나려 해도 쉽지 않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번 생에 자식을 낳아 키워본 적 없는 출가자가 어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그 고통을 가늠할 순 없더라도 가만히 듣고 위로의 눈빛을 건네는 게 전부였다.
그로부터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갈 무렵, 그 거사님으로부터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의 표정은 몰라볼 정도 달라져 있었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안부를 전해왔다. 또한 최근 자신이 재직하던 대학에서 정식 교수로 채용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함께였다. 그러고는 자기가 집에서 읽어 내려간 경전을 펼쳐 보이며 더듬더듬 의미를 새기고 다른 뜻을 묻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언제 등록했는지 자신의 영어 이름이 적힌 사찰 신도증을 받고 아기처럼 좋아하고 뿌듯해했다. 외국인이 한국의 전통사찰 신도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해인사와 결코 가볍지 않은 인연이 있으리라. 몇달 못 본 사이에 아픔을 딛고 일어선 거사님이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마애불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생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다 감사한 일이다. 다 인연일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마치 가을 하늘 뜬구름처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지나고 보면 그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제 곧 가을이 가져온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화려함을 뽐내던 형형색색의 단풍도 낙엽이 되어 나뒹굴다 아스러져 갈 것이다. 산짐승들은 긴 동면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고 한낱 미물 중생들도 나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행복이 영원할 수 없듯이 이 고통도 결국은 그 끝이 있다. 그래서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가야산과 가야산이 품고 있는 생명들은 항상 그래왔듯 말없이 그 변화하는 이치를 전해주고 있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연재 | 사유와 성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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