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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필자에게 왜 민주주의라는 가치 내지 이념을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등의 원리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권능에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정치 체계’라고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민주적 성취에 경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 데 있어서 재산, 교육, 태생, 신념 등과 같은 자격조건을 따지지 않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유일하며, 공적 이슈를 둘러싼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일정 연령 이상의 구성원 모두 평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상상은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경향신문DB> 

그러나 필자의 이런 생각이 그리 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서는 더하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을 평등에서 찾는 이론이나 주장이 훨씬 더 많다.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평등한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갖게 된 보통의 시민들은 쉽게 어리석은 우중으로 변질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계도되는 정치를 바랐다. 

평등의 원리, 민주주의 가치 핵심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관찰자로 알려진 토크빌 역시 평등해지고 유사해진 보통의 사람들은 사사로운 욕망과 즐거움의 추구에 의해 압도되는 경향이 있는 바, “결국은 정부라는 목자 아래 소심하고 부지런한 한 떼의 가축과 같은 국민이 된다”고 보았다. 평등화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약화시킨다거나, 자유와 평등을 서로 대립적인 가치로 당연시하는 주장이 근거 없이 통용되는 곳도 정치학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만연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진보를 앞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원인을 “대중의 보수화” 내지 뉴타운 개발과 같은 “대중의 욕망”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한 사례라면, 한나라당이 압승했던 2008년 총선 결과를 서민 대중들의 “계급배반 투표” 때문으로 보았던 설명은 또 다른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각성된 의식의 “깨어있는 시민”과 같은 자격 조건을 필요로 한다거나, 일반시민들이 “조·중·동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어서 문제라는 주장도 다르지 않다. 나아가 젊은 세대를 향해 유리한 취업 조건에만 신경 쓰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없으니 “세상이 이 모양”으로 되었다고 질타하거나, 서민들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하고 공적 문제에 참여하지 않아 이명박 정부가 전횡을 일삼게 되었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면 이들의 생각이 정말 민주적인가에 깊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 사회 서민들과 젊은 세대들은 시민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했다. 표를 던졌고 재정적 후원도 했으며 촛불도 들었다. 그런 그들의 자유 의지를 위축시킨 것은 불평등이 급격히 심화된 때문이지 시민됨의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런 그들이 현실의 불평등에 힘들어하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주장했던 세력들에게 실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해 민주주의의 종말이 오고 있는데 헛된 욕망이나 추구한다며 화를 내고 깨어나라며 훈계하고 야단칠 수 있는 특권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신뢰 못 얻는 정치세력에 책임

지난 정부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운동권 인사들의 시국토론회에 갔다 온 내 친구는 어땠느냐고 묻는 나에게 “보수적 기득 엘리트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기득 세력의 출현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해 깜짝 놀랐는데, 그렇다고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시민이 아니라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치세력에 있다는 생각의 전환은 왜 어려운 것일까. 그런 전환을 억압하면서 시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 담론은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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