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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필자는 학부 4년을 공부 외의 일로 소진한 뒤 사실상 대학원에 가서야 제대로 수업을 들었다. 정치사상사 과목 첫 시간의 주제는 정치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동서양의 역사와 고전을 소재로 해서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학문의 출발을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찾는 소크라테스의 테마가 오랫동안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일이란 단순히 학문의 출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력과 깊이를 보여주는 척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또 그런 채로 죽는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철학자라도 그럴 수밖에 없고, 그 어떤 위대한 이론도 인간 사회의 일부분만을 설명하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이론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므로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하며, 그래서 내 생각을 조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묵인과 타협, 포기 등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신의 세계보다 더 풍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과 배움

또한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에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갖는다. 정직하려 하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평화와 안녕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현실이 아닐 것이다. 권력과 통치 없이 질서를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조직 원리는 근본적으로 악마적 요소를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적 충동과 열정의 표출은 늘 절제와 책임감, 고민을 동반하게 되며 그런 것들이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가끔 필자는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해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비교적 단순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라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조금만 확장하면 쉽지 않다는 게 곧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정당은 어떻게 해야 좋아질 수 있을까, 선거제도는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은가,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모여 하는 선거연합의 시도는 어떻게 봐야할까 등등 이른바 내 전공 영역에 대한 판단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늘 유보적이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과 사회는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는 질문에 이르면 판단은 더욱 어려워지고 사실상 거의 좌절할 때가 많다. 물론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고 해서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있고 그런 질문에 대한 끝없는 탐색과 고민이 사고를 더 넓고 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너무나 강한 자기 확신과 절제 없는 주장을 대면하게 되면 몹시 불편해진다. 최근 한 일간신문에서 민주대연합을 강조하는 유명 지식인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분은 진보개혁세력의 연합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연합이 성사되면 선거 승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연합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야당은 “역사 앞에서 죄인이 된다”고 말했다.

절제없는 주장과 대면하면 불편

종교적 죄를 심판하는 대심문관이든 역사의 죄를 따져 묻는 지식인이든 어떤 인간도 윤리적 판단을 독점할 수 없다고 믿는 필자로서는, 왜 그리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듯 말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진보하고 개혁하자는데, 표현이 뭐 문제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고 말하고 싶다. 민주대연합은 하나의 의견일 뿐, 그 이상으로 강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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