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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직원을 “자식 같아서 때렸다”는 뉴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갑질’에 대한 분노와 ‘어떻게 맞아가면서까지 참고 직장을 다녔냐’는 빈정 섞인 동정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두 반응은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때려도 되는” 자와 “맞아도 참아야 하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동등하지 않으며, 이 사회는 불평등하다는 대중의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갑질은 지난 정권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갑질 현상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성별, 지역별, 학력별 그리고 연령별 갑질을 통한 억압적 위계는 사회 내에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왔다. 차라리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일방이 물리력을 행사하던 ‘무식한 갑질’에서 좀 더 제도화된 갑질 혹은 저항을 티 내지 않고 분쇄할 수 있는 권력 기제들이 훨씬 세련되게, 사회의 전 영역에 적용되도록 발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사회 전체에 불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면, ‘을’의 관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맞으면서도 참고 고개를 조아리거나’, 혹은 이제는 아예 저항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로부터의 탈주라는 원치 않는 갈림길에 놓인다.

전자의 길에 서면 사회 시스템에서 최대의 효용을 취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때 사회 구성원들은 체제의 공범이 되며, 갑질의 방관자가 된다. 그리하여 미시적 사회 관계는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야만’의 관계가 된다. 즉 가족, 사회적 유대나 공동체 의식, 그리고 신뢰가 사라진다. 후자의 길에 들어서면 이들은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거나 스스로 격리하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길, 즉 개인이 체제로부터 최대의 편익을 취하는 것에 머물거나, 혹은 사회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조건에서는 공히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점점 더 증가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무엇보다도 출산율이 감소하고 자살률이 증가한다). 사회적 생산력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체감(遞減)하며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유지되는 자본주의 자체에 위협이 된다.

유럽에서는 이미 지난 20세기 중반에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칼 폴라니는 1944년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작에서 19세기 초반 이후 자본주의 시장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사회 파괴를 경고하며 그 해법으로 ‘사회 방위론’을 제안했다. 이 해법에선 국가(법과 제도)가 ‘중립적 해결자’로 자처한다. 국가는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는 온존시킨 채,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와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권의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나 ‘적폐청산’, 갑질청산도 이런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이 정부의 개혁정치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지속적으로 파괴된 ‘사회’를 되살리기 위한 ‘정치적 리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에 과거의 발전 모델로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노선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국가의 사회에 대한 개입 증가, 재정조달의 문제에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불평등을 온존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을 은폐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사회 방위 국가’는 기존의 ‘블랙리스트 국가’보다는 선진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세련되고 온건하다고 해서, 덜 야만적이거나 덜 불평등한 것은 결코 아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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