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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상인이 시장을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깎아 세운 듯 높은 언덕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물건을 사서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한다. <맹자> 공손추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맹자는 폭리를 취한 상인을 천장부(賤丈夫), 곧 천박한 사내라 불렀고 천장부가 오른 높은 언덕이 바로 농단(壟斷)이다. ‘가장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이익이나 권리를 독점한다’란 의미를 갖게 된 농단의 어원은 유래조차 상업적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7일 구속수감되었다. 퇴임까지 40년 넘게 입었던 법복 대신 수용자 번호 ‘1222’ 명찰이 부착된 녹색 수의(囚衣)로 갈아입은 그가 받는 주요 혐의 40여개는 ‘사법농단’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의 기본적인 작용의 하나. 어떤 문제에 대해 법을 적용하여 그 적법성과 위법성, 권리관계 따위를 확정해 선언하는 일, 표준국어대사전은 사법(司法)을 이렇게 정의한다. 반면 상업(商業)은 상품을 사고파는 행위를 통하여 이익을 얻는 일이라고 적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사법과 상업을 격리한다. 상법을 적용하는 재판정에서조차 재판은 비상업적이다. 재판은 사고파는 상품이 될 수 없고, 개별적인 재판을 통해 판사가 얻는 이익이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사법농단이 사실이라면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은 무엇인가?
지난해 6월1일,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결과가 나온 뒤 일주일 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 관여한 바 없다”고 단언하며 “대법원의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달 4일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 50여명은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결의문에서 “관련자들에 대해 성역 없는 엄정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고, 이어 11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는 의결이 뒤따랐다.
모든 재판은 신성하다. 대법원의 재판만 신성한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신성하다고 힘줘 말하고자 한 단어는 ‘재판’이 아니라 ‘대법원’이 아니었을까? 한쪽에선 신성을 긍정하고, 다른 쪽에선 성역을 부인한다. 신성함과 성역 부인의 간극은 커 보이나, 재판은 신성하되 그 재판을 하는 사람과 조직이 성역화될 수 없다는 의미에선 조화롭다.
기원전 4세기 말 맹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정치고문으로 수년간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권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선왕이 재물로 회유하며 붙잡으려 하자 맹자는 자신은 농단에 올라 이득을 독점하는 장사꾼이 아니라고 말하고 제나라를 떠난다. 정권의 결탁 제안을 거절한 맹자는 이익 독점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농단이라 말한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거래 대가로 정권에 결탁을 제안한 게 사실이라면, ‘바로 이것이 농단이다’라고 맹자가 외칠 것 같다.
양 전 대법원장,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인해 국민들이 입은 농단의 상처가 깊다. 성역 없는 조사와 공정한 재판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이것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국회가 상처를 치유하는 법안을 마련하면 좋을 성싶다. 자신들에게 드리워진 갖가지 의혹을 변명하듯 기발하고 치밀하게 말이다.
<이상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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