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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교보문고는 예사로운 고유명사가 아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내게는 서울 구경 중 으뜸가는 장소였다. 서울 거리 풍경이 내가 살았던 소도시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서점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책장들 사이에서 헤매곤 했다. 책장 코너가 익숙한 후에는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외국 서적 코너에서는 읽을 수 없는 책들의 이미지에 반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를 상상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독자로서 회고를 늘어놓자는 건 아니다. 나는 출판인이다. 이제 교보와 책이라는 상품을 놓고 대화하고 거래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보문고를 세운 대산 신용호 선생의 탄생 100주년 음악회를 다녀온 날.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에 감동받은 가슴을 다독이며 가을밤을 꽤 걸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신용호 선생이 정한 서점 영업 원칙 다섯 가지를 사회자가 조용히 일러주었다.

일, 모든 고객에게 친절하라, 나이 어린 고객에게도 존댓말을 써라. 이, 책장 앞에 오래 서서 책을 읽더라도 그대로 존중하라. 삼, 책을 사지 않고 나가더라도 눈총을 주지 마라. 사, 책을 펼쳐서 필사하고 있어도 그냥 놔두어라. 오, 설령 책을 훔쳐가는 걸 보아도 나무라지 말고 타일러라.

서울 종로 교보문고 독서 테이블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정지윤 기자

36년 전 교보문고 창업 때의 서점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독학으로, 오로지 책으로 세상의 지식을 얻은 신용호 선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책의 세계가 제도 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자신했을 터다. 배움에 굶주린 자라면 누구든지 서점에서 맘껏 책을 향유하라고 권유하던 시기였다. 지금 다시 읽는 저 영업 원칙은 순수해서 감동마저 준다. 요즘 서점에는 필사 대신 스마트폰으로 본문을 찍어대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책을 오랫동안 펼쳐서 구기거나 더럽히는 독자도 있다. 더러워진 책은 그대로 출판사에 반품되어 폐기되는 경우도 있으니, 신용호 선생의 뜻이 세태 속에서 약하게 깜빡거리는 불빛 같다.

교보문고 창업 당시 일화는 신용호 선생의 아호 ‘대산’처럼 크고 웅장했다. 세종로, 가장 비싼 상권에 서점이라니, 모기업인 대한교육보험 관계자들은 임대료를 계산하지 않더라도 서점은 무조건 적자라며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용호 선생은 서울 한복판에 청춘이 모여들게 하고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야 나라가 산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책 백화점을 차리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면 없는 물건이 없지요. 누구나 각자 찾는 책을 접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외국 서적도 수입해서 팔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치원 학생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책을 찾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마음대로 책을 들춰 보고, 돈이 없으면 서서 읽고 가는 도서관 같은 책방을 만드는 것입니다.” 선생의 강력한 의지는 독자가 바라는 서점의 본보기를 마련했다.

모든 각자가 찾는 책, 다양한 책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교보문고는 학술 서적이나 전문 서적 공간도 자리 잡고 있어서 모두에게 크나큰 개인 서재가 되어주었다.

그 교보문고에 요즘 출판인들의 한숨이 닿고 있다. 매대 상당수를 판매자인 서점이 자연스럽게 책을 진열한 것이 아니라 공급자인 출판사가 돈을 내고 자사의 책을 홍보하는 것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출판사도 매대를 산 적이 있다. 심지어는 다른 출판사들이 먼저 매대를 예약하는 바람에 구입할 수 없어서 섭섭해하기도 했다. ‘교보 매대 건’이라고 속칭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서점 광고, 마케팅의 하나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으니까. 일이 크게 불거진 지금은 생각을 다잡지 않을 수 없다. 책은 역시 내용과 취향으로 선택받을 때 가장 아름답다.

책이라는 매체의 변화와 독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저자의 글쓰기, 출판사의 역할, 서점의 판매 방식도 모두 달라지고 있다. 교보문고만큼은 변해선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산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것은 그 정신이, 그 이름이, 그 상징성이 너무도 크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아직도 책 본연의 힘을 믿던 그 옛날의 교보를 기억한다.

교보문고는 창업 당시에도 ‘적자’가 걱정되던, ‘책을 판매하는 곳’이다. 문화의 장으로 발전하고 우뚝 선 곳, 그런 교보가 문화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변화하는 방식, 공급자인 출판사와 상생하는 방식은 없는 것일까, 새로운 독자가 느는 것, 그 답이 가장 정확한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답에 이를 수 있을까. 책은 돈으로 산다고 해도 사람 마음을 돈으로 사기 힘들다지 않나.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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