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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에서 방금 돌아왔다. 처음 가본 곳이었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 애드벌룬을 타보고 싶다는 오랜 열망을 펼칠 수 있었다. 겨울 새벽에 카파도키아의 독특한 지형 위로 날아오르는 순간, 또 지상 1000m에서 일출을 맞이하면서 ‘아름답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무수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목격했지만 언제나 아름다움은 새것이었다. 이전의 감정이 환기되는 것이 아니라 기시감은 전혀 없는 처음의 감동으로 아름다움을 맞았다.

여행 내내 함께한 책은 내가 일상의 경전처럼 삼고 있는 이성복 시인의 <극지의 시>였다. 강의에서 시인이 했던 말, 짧게 메모한 것들. 인터뷰를 통해 시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책이다. 여행자로서 낯선 세계에서 관계 맺는 수많은 사람들, 현지의 상인과 시민들 사이로 나는 들어갔다. ‘나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라고, ‘나는 타자의 그림자이며, 나의 삶은 타자의 그림자놀이’라는 시인의 말, ‘타자의 발견’이 여행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울렸다. 짐을 싸고 풀면서, 입에 조금 거친 음식을 먹고 풍경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내 인생의 관계들은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여행에서 어색한 순간을 맞이할 때는 이 문장이 구원처럼 눈에 밟혔다.

“애들 태우고 차를 운전해 가다가도, 급한 순간에는 자기 쪽으로 핸들을 튼다고 하잖아요. 사람은 원래 자기한테 유리하게 행동하게끔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자기편이 아니라 세상 편에 서려고 노력해야 해요. 본래 안되지만 평소에 그렇게 믿고 되새기지 않으면 더 안되는 거예요.” 시인의 통찰은 내가 어디에 있든 덜 나빠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데 거울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행동하려는 몸을 풀어놓는 것. 여행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의외로 자신과 타인에게 너그러워지지 않는 마음을 다독였다.

왜 문학서를 챙겨 갔는가. 소중한 사람과 동행하는 느낌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숙소로 돌아와 짧게 읽는 행위를 즐기는 동안 그날의 여정을 되새기며 두 번째 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시간을 쪼개어 쫓기듯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걸음을 복기하고 반복하며 시간을 풍성하게 늘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좋아하는 문장에 눈길을 멈추고 여행길 에피소드를 대입하며 충만한 느낌을 느꼈다. <극지의 시>를 읽으며 피로에 지친 몸, 설레고 기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흥분한 마음 그대로 나는 누구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이 또 좋았다. 두 번째 여행을 하는 독서라는 게 딱 맞는 말이었다.

<극지의 시>는 낯선 곳에서 만난 누구든 자신의 삶을 통해 시를 쓰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보통 시인이 시를 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의 시를 가지고 싶던 간절한 순간에 책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하면 눈물이 날 것처럼 뭉클했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 건 다른 것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진실한 것, 올바른 것도 그 자리에서 다른 것들의 진실함, 올바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또 어떤 대상이 시적일 수 있는 것은 화자의 자리에서 관찰되고 서술되기 때문이고, 시적 감동이란 독자가 화자의 자리에 섰을 때 이루어지는 거라고 했잖아요. 이 화자의 자리는 결코 시인이나 독자의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잠시 머물다 갈 뿐이에요.”

여행길에서 아름다운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육화시킨 것은 그때 머리를 지나간, 겹겹의 의미를 띤 문학적 낱말들과 문학을 읽어온 눈이었다. 복잡하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층층이 의미가 아로새겨진 단순한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함께 가져간 터키 여행서도 문학서처럼 읽혔다. 실용적인 책에서 다루는 실질적인 정보는 금세 새로운 정보로 갱신될 것이다. 그러나 책이라는 매체가 주는 안도감은 컸다. 글자로 먼저 따라가는 여행길은 편안했다. 다녀와서 확인한 정보는 여행을 복기시키고 정말 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나열된 사실인 줄로만 알았던 정보들은 책장을 넘길수록 가슴을 데웠다. 무용한 책은 없다. 문학과 실용의 경계가 사라진 독서, 이러한 차원을 문학적이라고밖에 말 못하겠다.

한 권의 문학서와 또 한 권의 실용서가 내게는 어떤 여행 물품만큼이나 든든했다. 때로는 짐을 꾸릴 때 낡은 옷을 가져가서 입고는 버리기도 했다. 종종 가져간 책을 현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주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두 권의 책을 모두 다시 챙겨 돌아왔다. 이번 여행의 감흥을 더 느끼고 싶어서였다. 저 두 책으로 복기될 기억, 일상에 일으킬 파장이 걱정돼 감히 책장을 못 열고 있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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