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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씨네 술집.’ 십년 넘게 드나들던 단골집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 땅거미가 지면 옆구리가 허전해지는 ‘황혼병’이 도질 것 같아 걱정이다. 내게는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다. 주인이 내 오랜 후배였다. 1980년대 초반 만났고 나이 차도 많이 나지 않으니 친구라고 하는 게 옳겠다. 문학청년이었던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사업에 손을 대는가 싶더니 1990년대 중반 이후 십여년간 연락이 끊겼더랬다.

그사이 친구는 명함이 여러 개였다. 음반 장사를 하다가 히말라야 오지를 여행하기도 하고 책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6년 서울 혜화동 로터리 골목 입구에 술집을 차렸다. ‘역마살’을 털어내고 눌러앉은 것이다. 테이블이 채 열 개가 안 되는 작은 술집. 안주가 제법이었다. 도미뱃살, 고등어초절임, 가자미식해 등을 조리하는 친구의 손맛은 이내 소문이 났다. 단골이 생겨났다.

친구 술집은 대학로 골목상권의 성공사례로 떠올랐다. 그런데 5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힘에 부친 모양이었다. “13년째야. 이젠 좀 쉬고 싶어.” 친구의 결단에 나는 박수를 보냈다. 매 순간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손님’이기도 한 나는 상실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단골집 하나가 또 사라지는구나. 친구가 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오래된 장소가 사라지는 것은 단골들에게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장소가 사라지면 어디에서도 되찾을 수 없다. 단골집 폐업도 애도의 대상이었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장소’는 각별하다. 보통은 공간과 장소를 구별하지 않지만 인문학자들은 저 둘을 구분한다. 그 기준은 사람의 개입 여부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사람의 이야기(문화)가 깃들어 있으면 장소이고 그렇지 않으면 공간이다. 이 잣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이야기가 있는 장소에서 태어나 여러 장소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살다가 특정 장소에서 이야기를 남기고 눈을 감는다.

굳이 환기할 필요도 없지만 좋은 삶은 좋은 장소에서 이뤄진다. 역도 성립한다. 좋은 장소가 좋은 삶을 만들어낸다. 사회라고 다르지 않다. 좋은 사회는 좋은 장소가 많은 사회이고 나쁜 사회는 나쁜 장소가 많은 사회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수행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생각난다. 행복의 요건은 단 두 가지라고 한다. 첫째, 좋은 나라에서 태어날 것. 둘째,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날 것. 좋은 부모는 곧 좋은 집이므로 행복은 전적으로 장소의 좋고 나쁨과 직결된다.

좋은 장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향집이다. 하지만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대부분에게는 찾아갈 고향집이 없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내 고향은 1980년대 후반 개발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마을은 물론 옛길과 물길, 산과 들이 죄다 사라졌다. 그리고 이농향도. 우리 세대는 근대화의 물결에 떠밀려 대도시로 빨려들었고 대부분이 도시 유민으로 청장년기를 보냈다. 주민등록지가 바뀐 횟수를 떠올려보라. 이삿짐을 꾸릴 때마다 고향 상실에다 ‘장소 상실’이 더해져 단골집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을 것이다.

단골집, 고향집에 대한 언사가 일부 젊은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시사IN’ 변진경 기자가 펴낸 <청년흙밥보고서>에 따르면 ‘흙수저’ 출신 청년들이 열악한 식사, 즉 ‘흙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옥고’에서 살고 있다. 지옥고란 지하실, 옥탑방, 고시원이 합해진 신조어다. 지옥고에서 혼자 흙밥을 떠넘기며 갈수록 좁아지는 미래의 문을 응시하는 청춘들 앞에서 ‘장소의 장소다움’을 거론하는 것은 한가해 보일 수 있다. 이들에게 단골집에 관한 넋두리는 특수부대 출신 아저씨의 무용담처럼 들릴 수 있다.

변진경 기자는 청년들에게 말한다. “지금 당장 가난한 밥상을 뒤집어라. 그리고 (어른들에게, 사회를 향해) ‘괜찮지 않다’고 말해라.” 최근 개봉한 영화 <가버나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쁜 나라, 나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레바논의 한 소년이 불평등과 빈곤, 불의와 폭력이 만연한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하지만 ‘있지만 없는 존재’인 소년에게는 안전한 장소가 주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급기야 자신의 부모를 법정에 세운다. 자신을 태어나게만 했을 뿐 전혀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부모를 제소한 것이다.

<청년흙밥보고서>가 전체의 일부분이라고, <가버나움>이 먼 나라의 픽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소다운 장소가 없는 사회를 방치했다간 우리 기성세대가 법정에 불려 나갈 수 있다. 괜한 소리가 아니다. 환경운동가 카를 바그너는 향후 40년 인류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다섯 가지 힘 중 하나로 ‘세대 간 갈등’을 꼽았다. 장소가 세대 간 갈등의 구체적 현장으로 떠올랐다. 국가와 사회, 지역과 세대를 막론하고 좋은 장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우선은 좋은 장소를 만들어가는 공동의 노력이 그 자체로 ‘좋은 장소’ 역할을 해낼 것이다.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있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만든 장소보다 장소가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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